[신한열의 떼제 일기]

ⓒ신한열

가을이 깊어 간다. 한국과 달리 이곳의 가을은 비교적 짧고 흔히 10월에 첫 얼음이 언다. 올해는 단풍이 유난히 곱다. 햇살이 비치면 금세 가을빛의 향연이다. 짙고 옅은 노랑과 갈색, 초록과 붉은 나뭇잎 위로 파아란 하늘이 펼쳐져 있으면 감탄의 환성이 절로 나온다.

숲 속에는 갖가지 버섯이 자란다. 근처 숲으로 산책을 갈 때마다 한 바구니씩 캐 온다. 레피옷, 볼레, 세프, 지롤 등 우리말로 옮길 수 없거나 '양의 발', '죽음의 나팔' 등 재미있는 이름의 갖가지 버섯은 맛도 일품이다. 우리 가운데 두세 명의 형제들이 주로 버섯을 캐 와서 요리를 한다. 조용한 숲 속, 낙엽 사이로 자라는 버섯을 캐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그것을 다듬어 볶아 내놓으면 행복한 표정으로 먹는 형제들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버섯을 잘 모르는 젊은 수사가 우리를 따라하려다 비슷한 모양의 독버섯을 캐서 냉장고에 넣어 두는 일이 매년 생기지만, 다행히 늘 발견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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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람들이 성당에 가장 많이 가는 날

10월의 마지막 날, 가을 햇살이 가득 메우고 있는 근처 계곡으로 산책을 갔다. 50여 명이 사는 조그만 마을. 할머니 두 분이 전몰장병 추모탑과 성당 입구 묘지에 국화 화분을 놓고 있었다.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에 망자를 생각하고 묘지를 찾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프랑스 사람들이 성당에 제일 많이 가는 날은 부활절도 성탄절도 아닌, 모든 성인의 날 대축일이라고,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은, 성당보다 묘지를 방문하는 것이다. 성당에 나가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이 묘지는 찾기 때문이다. 시골에는 거의 모든 마을 성당의 입구나 뒤에 공동 묘지가 있다. 크고 무거운 돌로 덮여 있는 무덤마다 이맘때면 새 화분들이 놓인다. 그것을 보면 누구 집에서 얼마나 다녀갔는지 혹은 아닌지 알 수 있다.

“11월 2일이 위령의 날(모든 영혼의 날)이지만, 보통 그 전에 꽃을 가져다 놓아요. 우리 어머니들이 하시던 대로 우리는 계속 이렇게 하는데, 이삼십 년 뒤에는 아마 이런 풍습도 아마 사라지고 없겠죠? 모두들 먼 외지에 나가서 살고 있으니까....”

수백 년 전 클뤼니의 수도자들이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예쁜 마을 성당에서는 이제 미사가 1년에 한 번도 있을까 말까다. 사실 적지 않은 성당들이 그렇게 버려져 있다. 미사가 없어도 그런대로 깨끗하게 유지되는 곳은, 한두 명의 신심 깊은 신자 (대개 노인) 덕분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 가능할까?
“옆 마을의 성당은 여기보다 더 크지만 부활절에도 이젠 미사가 거행되지 않아요. 하긴, 사제수가 워낙 모자라니까 어쩔수 없지요.... 이 지역의 장례식은 평신도가 집전하는 경우가 3/4이랍니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한참 동안 쓰지 않던 마을 성당을 코뮨 (프랑스의 지방 자치단위)이 팔아서 카페인지 게스트하우스로 활용하는 곳도 있더라구요.”

이곳 성당들은 모두 문화재라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할머니들의 얘기는, 세상이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영적으로는 더 가난해졌다는 데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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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교세의 쇠락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몇 달 전에 93살로 선종한 라구트 신부는 교구 사제였다. 은퇴 뒤 선종 때까지 마지막 몇 년은 이 지역의 비교적 큰 양로원에서 머물렀다. 연세는 많아도 다정하고 열린 이 신부님에게 “양로원에서 미사를 드리시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미사를 청하는 사람도 없고 미사를 드린다고 공지해도 참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대답을 듣고 놀랐다. 그분은 가끔 다른 양로원을 찾아가서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젊어서 교회에 나가지 않던 사람들이 은퇴 후에 교회에 나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외국에서는 여전히 프랑스를 가톨릭 나라라고 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교회의 맏딸” 혹은 “성인들의 나라 프랑스”는 그냥 옛말일 뿐이다. 작년 12월에 낭트 행정법원은 도청에 성탄 구유를 설치하는 것이 일종의 중립성 위반이라고 판결했다. 구유에 소와 양과 나귀는 괜찮지만 아기 예수와 마리아, 요셉의 모습은 가져다 둘 수 없다는 것. 한 기차역에서는 종교편향이라는 이유로 구유를 철거해야 했다. 공공장소에 설치된 성탄 구유에서 성가정 대신 미키 마우스와 아스테릭스 같은 만화의 주인공들을 보는 것은 더 이상 새롭지도 않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프랑스의 비그리스도교화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원인과 방식으로 긴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가톨릭 신자의 감소와 종교 (신앙) 교육의 부족, 이민으로 인한 인구 구성의 변화를 볼 때 이 추세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또 프랑스 특유의 철저한 정교 분리 정책과 사고는, 오랜 세월 동안의 정교 유착과 비가톨릭 차별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되었지만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가끔은 지나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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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이제 선교지가 되었는가?

이런 가운데 어떤 농촌 교구들은 사제가 10명도 되지 않고, 과거의 본당 규모로까지 줄어들었다. 아장 교구는 사제 수만큼 본당을 통합하다보니 10년 동안 본당 수가 420개에서 26개로 줄었다. 랑그르 교구에서는 사제 한 사람이 60개의 성당을 책임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선교지인가?” 이 질문은, 가톨릭교회가 노동 계층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에 대한 깊은 반성에서 시작된 노동사제 운동의 초기에 그 촉발제가 된 유명한 책의 제목이었다.(1943년 발행) 이제는 새삼스럽게 이런 질문을 할 필요조차 없다. 여러 교구에 아프리카 출신 사제들이 점점 많아진다. 여성 수도자는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에서 사목하는 한국인 사제와 수도자도 그리 많지는 않지만 계속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프랑스 교회의 전망이 어둡다고 해야 할까? 교회를 성직자와 수도자, 신학생의 수로 평가한다면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여러 해 동안 사제 서품자도 신학생도 없는 교구, 노인들이 주로 있는 수도원이 적지 않으니까. 재정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교회는 물질적으로도 가난하다. 1905년 정교 분리 이전에 지어진 교회 건물은 모두 국가 재산이다. 교회는 이것을 되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돌려받더라도 유지 관리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교회의 정치적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한 듯하다. 윤리와 관련된 논쟁적인 이슈에 대해 교회가 발언은 하지만 입법과정에 효과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많은 주교들과 젊은 사제들, 열심한 신자들은 프랑스 교회의 미래에 대해 전혀 비관적이지 않다. 교회는 결코 신자나 사제 수 혹은 재정 등 물량으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 방학을 맞아 지난 2주 동안 수천 명의 프랑스 젊은이가 떼제를 다녀갔다. 이 무렵에는 항상 많은 주교들이 이곳에 와서 청년들을 만나고 함께 기도에 참석하고 그들의 얘기에 귀기울인다. 프랑스의 여러 교구에서는 젊은이들이 견진을 받으려면 주교에게 청하는 편지를 써야 한다. 듣기로는 많은 젊은이가 떼제를 다녀간 체험을 쓴다고 한다. 주교들은 그 편지를 읽으며 젊은이들의 영적 갈망을 헤아릴 수 있다. 릴의 울리시 대주교는 견진자들에게 일일이 답장을 쓴다.

이곳에 오는 프랑스 주교들에게 사제 성소나 미사 참석율 감소가 가장 큰 문제는 아닌 듯하다.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향수도 세속화된 사회를 적대시하는 태도도 없다. 모두들 변화하는 프랑스 사회 안에서 나름대로 “시대의 표징”을 읽고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려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교회는 분명, 변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가톨릭 교회가 수적으로는 소수로 남겠지만 (어찌보면 이미 그렇게 되었다!) 그것을 아쉬워하거나 한탄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가난하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고, 겸손하기 때문에 복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 교회 안팎으로 권력과 금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만큼 예수님의 가르침에 더 충실하고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늦가을과 초겨울에 나무를 심는다. 심은 나무가 뿌리를 제대로 내리고 자라기 위해서는 겨울 동안 꾸준히 조금씩 내리는 비가 꼭 필요하다.

지금은 교회가 나무를 심을 계절이 아닐까? 땀 흘리며 나무를 심은 다음에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기까지는 인내심으로 기다려야 한다. 바오로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새봄이 오기 전에 긴 겨울이 이어지더라도 걱정하지 말 것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에게는 겨울비도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다.

ⓒ신한열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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