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령의 날, 세월호참사를 생각하며

아직도 시신도 찾지 못한, 이제는 ‘미수습자’라 불리는 세월호참사 희생자 아홉 분이 아직 배 안에 있습니다. 아니,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그중의 한 명인 허다윤 학생! 다윤 엄마가 광화문 광장, 세월호 미사 말미에 자신의 심정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1년 6개월이 흘렀는데도, 사람들 앞에 서 딸 이야기를 하려니, 눈물부터 흐르는 엄마입니다. 엄마의 그 마음에 그동안 조금은 무감각해졌을 제 마음에도 어느새 촉촉이 물기가 번집니다.

다 같은 희생자 가족이지만, 처지가 다르다고 합니다. “시신을 찾은 부모, 가족들은 부당하게 행동하는 정부와 대놓고 싸울 수 있지만, 우리 미수습자 가족들은 그렇게 할 수도 없거든요.” 흐느낌 속에서 겨우 내비치는 속내입니다. 자식의 시신을 아직 찾지 못했으니, 아무리 미워도, 실제 권력인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답니다.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이게 우리 앞에 놓인 엄연한 현실입니다. 도대체 이런 처지에 놓인 이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 '욥', 레옹 보나.(1880)
오늘은 위령의 날, 우리는 교회의 전통에 따라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을 기억합니다. 아름다운 풍습입니다. 영문도 모른 채 창졸간에 차디찬 바닷속에서 세상을 떠난 세월호참사의 희생자도 물론 우리의 기억과 기도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태부족입니다. 희생자들 뒤에 남겨진, 어쩌면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과 억울함을 겪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들의 아픔과 한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욥 19,23) 자신의 한과 고통이 묻혀 버리지 않도록 사람들이 기억해 주길 바라는 욥의 간절한 마음, 바로 다윤 엄마의 마음입니다. 오늘, 다윤 엄마가 욥입니다. 세월호참사의 미수습자, 그 가족들이 욥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이들에게 최소한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기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영문도 모른 채 억울하게 죽어 간 이들이 있고, 그 뒤에 남겨진 이들이 있습니다!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은 이들의 한이 되고, 일상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냥 있겠습니까! 살아 있는 한, 물러날 순 없습니다. 억울해서, 도저히 그만둘 수 없습니다. 하지만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정의가 더욱 절박해집니다.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욥 19,26-27)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는 분을 찾는 욥의 간절한 마음, 바로 다윤 엄마의 마음입니다. 오늘, 다윤 엄마가 바로 욥입니다. 세월호참사의 미수습자, 그 가족들이 욥입니다. 우리의 위로는 이들의 애원과 염원에 대한 응답으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땅에는 숱한 욥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 해고 노동자들이 떠오릅니다. 해고가 개인만이 아니라 한 가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사업주는 생각해 보았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거의 3000에 이르는 인원의 ‘정리해고’를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회계 조작을 통해서. 어떻게 지금까지 일하던 사람들을 문자 하나로 해고할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한 회사를 문 닫아 버리고 더 싼 임금을 찾아 옮길 수 있을까? 어떻게 대기업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해도 아무런 법적 제지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한 개인의 집 앞에, 논밭에, 높이가 100미터나 되는 철탑을 그토록 쉽게 박아 버릴 수 있을까? 어떻게 공기업인 마사회가 앳된 학생들이 오가고 주민들의 일상이 이루어지는 곳에 대형 경마도박장을 몰래 지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정부가 수많은 사람들을 도박중독자로 만들고 그들의 가정을 파괴하는 경마도박장을 합법이라고 방치, 옹호할 수 있을까? 말 하지 못한다고, 어떻게 그리 쉽게 강을 망가뜨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산을 망가뜨리려 할 수 있을까? 이제는 역사를 독점하고 왜곡하여, 우리들의 정신까지 넘보려고 하는구나! 그렇게,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과 억울함의 기억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려 할 테지! 세상의 합법화된 폭력의 지배로, 사람과 자연 도처에서 신음소리만 넘쳐납니다.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눈을 돌려 이들의 고통과 한을 기억하기, 희생자들과 함께 폭력에 맞서기, 이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의 말씀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할 것이다.”(마태 5,4.6) 기억과 연대로 세상의 폭력에 맞서고 폭력의 희생자들과 함께하려는 우리도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예수의 말씀이 현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7.9.10)

위로는 기억이고, 망각의 거부입니다. 위로는 연대이고, 방관의 거부입니다. 기억과 연대로 위로할 때에,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 온 이 땅의 모든 이들, 산과 강과 바다, 그리고 그 안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조그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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