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용 신부] 11월 1일(모든 성인 대축일) 마태 5,1-12

행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설령 누군가가 “내 인생은 망가졌어.... 난 앞으로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어”라고 말할지언정, 그 사람 안에는 행복에 대한 그 누구보다도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는 것 밖에 할 줄 모르는 갓난아이도, 해 볼 것 다 해 보고 더 이상 인생에서 바랄 것이 없다는 노인도. 인간은 언제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더 큰 행복과 더 작은 행복, 순간적인 행복과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 등 모든 행복이 같은 값을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배가 고플 때, 빵 하나를 먹으면 행복해질 수 있지만, 따끈하게 데운 우유까지 있다면 더욱 행복해질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제 사람들은 더 큰 행복, 더 많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옷 하나를 입어도 나에게 어울리는 색과 맵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옷에 어떤 브랜드가 박혀 있는지를 먼저 따집니다. 남들도 다 명품 옷을 입는 것 같은데 나도 한번 입어 봐야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집이란 것도 좋은 이웃들과 지내며 내가 사는 데 큰 불편이 없으면 그만이지만, ‘어느 지역은 한 달 사이에 얼마가 올랐더라’하는 이야기에 솔깃합니다. 혹, 내가 아는 누가 아파트 하나 잘 사서 몇 천, 몇 억을 만졌다고 하면 금세 나는 불행해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 불편 없고 사랑스러웠던 내 집인데 그 집이 원망스러워집니다.

옆집의 누구는 서울대를 가고, 엄마 친구 아들 누구는 큰 회사에 들어가고, 저 사람은 이번에 쌍꺼플 수술이 잘 나와서 예뻐지고, 나보다 공부 못하던 그가 토익 점수가 900이 넘었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에 귀가 커집니다. 어느덧 모두들 행복을 원한다고 하지만 정작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선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와 남을 비교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의식하며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덧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 아니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쫓아다니는 것들에 휩쓸려 버리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행복은 점점 비싸집니다. 값비싼 옷을 사야 하고, 큰 아파트와 큰 차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아이들을 조기 유학 보내거나 아니면 강남에 살아야 행복해질 것 같습니다. 무리를 해서라도 성형수술을 해야 하고 최신형 핸드폰을 들고 다녀야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행복은 점점 비싸지고, 그 행복을 사기 위해 밤으로 낮으로 열심히 일만 하며 살지만 언제나 행복은 나보다 한 발짝 앞에서 나를 비웃듯 달아납니다. 박탈감과 상실감만 생기고, 때로 남을 향한 부러움의 시선은 증오와 경멸로까지 나아가기에 우리 모두는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할 수 없고 마음에는 불만이 커지고 걱정만 쌓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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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세상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는데 죽어라 일해서 얻게 되는 비싼 행복 말고 지금 여기에서 당장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정말 없는 것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행복에 대해 여덟 가지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큰 아파트, 예쁜 외모, 높은 토익 점수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기한 조건 투성이입니다.

마음이 가난을 사랑할 줄 알고, 슬픔을 느낄 줄 알고, 온유함을 품으며, 정의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고 평화를 이루는 것. 이렇게 세상과 반대로 살아가기에 박해를 받을지라도 오히려 우리는 진정 행복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뭐하러 용서하느냐. 어떻게 그런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냐”라는 말을 들어도 나를 박해하는 이를 용서하는 사람. “그렇게 생각 없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 넌 어떻게 사니”라는 말을 듣더라도 가난한 이웃을 돕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나 몰라라 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말하면 윗사람들한테 찍힌다. 적당히 넘어가는 게 지혜로운 거야”라고 말하는 세상에 정의를 외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사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그러고 보면 이런 말씀을 따른 사람들은 모두가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가진 것을 다 버리고 가난을 추구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랬고, 끝까지 왕실 권력에 비굴하지 않았던 토마스 모어 성인이 그랬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마더 데레사 수녀님, 또한 가진 것을 나누고 이웃에 봉사하는 무수히 많은 사람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삶이 최고로 행복하다고 이야기하고 더 이상 시간에 쫓기고 돈에 쪼들리고 사람에 치이지 않아서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며 다른 사람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인물들을 성인으로 공경하며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모든 성인의 삶은 세상의 방향과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 세상을 거스르며 살고 때때로 박해도 받고 모욕도 당했지만 우리는 그분들을 성인으로 공경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행복을 추구해야 할까요.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 같은 모습을 추구하며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려 아등바등 거리는 값비싼 행복일까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따르며 살아가는 참된 행복일까요? 오늘도 우리 귀에는 행복해질 수 있는 주님의 복음이 들려옵니다. 그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이제 더 이상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나의 모습에 집중하며 우리 보다 앞서 하느님 말씀을 따라 살았던 성인들의 삶을 희망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수용 신부 (이냐시오)
천주교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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