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진, "신조선책략", 김영사, 2013

먼저 고백하건대, 책을 펼치기 전부터 일종의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신조선책략’이라는 제목 때문이었다. 저자가 제목을 빌려 온 “조선책략”이라는 책은 1880년 일본에서 근무 중이던 중국인 외교관 황준헌이 지은 글이다. 황준헌은 조선의 생존을 위한 책략임을 내세웠으나, ‘번방’(조공을 바치는 나라)인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지 않으려는 중국의 입장을 전제로 한 외교 전략이었다. 하여, 21세기의 급변하는 동북아 질서 속에서 한국의 나아갈 바를 ‘조선책략’이라는 말을 빌리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가, 하는 마뜩찮은 느낌을 가진 채 책을 펼쳤다. 그리고 불행히도, 그 느낌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을 주장했다. 그리고 “신조선책략”의 저자는 “한미동맹, 한중협력, 한일교류”를 주장하고 있다. 사용하는 말이 달라졌고 외교상 친소관계의 비중도 달라졌지만, 중, 미, 일이라는 세 나라와의 외교적 협력을 통해서 한반도가 처한 난국을 헤쳐 나가야 한다는 데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런데, “조선책략”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조선의 자강을 도모하라는 목표를 분명히 함에 비해, “신조선책략”은 그래서 우리의 나아갈 바는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 최영진, "신조선책략", 김영사, 2013
국민 소득이 더 늘고 있지 않다는 지적으로 보아 경제적 성장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도 하고, 북핵 문제를 계속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한이라는 위협 세력에 대한 견제 및 통일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 두 가지 모두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언급은 외교 문제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스쳐 지나가듯 나타날 뿐,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 외교이며 책략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목표가 먼저 정해져야 수단을 논할 수 있는 법이다. 그 수단이라는 것이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 일본과 과거사 문제의 잠정적 유보까지 포함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외국과의 공조를 먼저 이야기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라는 것은 꽤나 공허하게 들린다. 게다가 그 불편한 감정을 ‘국민이익’에 반하는 ‘피해의식’이라 말하는 데 이르러서는 공허함이 불쾌함으로 변한다. 국민 대다수가 느끼는 불편함을 ‘피해의식’이라고 치부하고 잠시 밀어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그래야 할 만큼 중요한 ‘국민이익’의 실체가 무엇인지부터 먼저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바는, 국제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안일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21세의 국제관계는 ‘전쟁에서 무역으로’ 그 패러다임이 전환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북핵문제를 포함한 한반도 주변 국제 관계에 대한 모든 논의는, ‘전쟁에서 무역으로’의 전환이라는 대전제 위에서 출발하고 있다. 아주 큰 틀에서 볼 때, 인류가 전쟁을 통한 공멸보다는 시장의 유지라는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멀리는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지전에서부터 가깝게는 현재 남중국해에서 계속되고 있는 미-중 간 군사적 긴장까지,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 패러다임’의 국제관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저자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고, 이에 대해 ‘수천 년 동안 우리를 지배했던 올드 패러다임이... 관성의 법칙에 따라 상당 기간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상당 기간’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리 길지는 않은 시간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리고 보다 중요하게는 올드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는 나라는 북한, 이란, 러시아 등 후진국이며, 이들 후진국은 새로운 국제관계 속에서 도태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무기를 싣고 조선에 온 서양 세력과 일본이 요구한 것은 ‘통상’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후진국’ 간의 전쟁 무기를 조달 혹은 판매하고 있는 ‘선진국’이 있으며, 동북아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적 긴장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선진국’(혹은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에서 촉발되고 있다. 올드 패러다임의 잔존 기간은 저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길 것이며,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실제 주도하는 것은 경제적, 군사적 강대국이다.

중국과 미국은 쉽게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군사적 전면전에 한해서만 그러하며, 그 이유는 서로 힘의 균형이 팽팽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중국의 대미 협력의 배경에 대해 ‘중국이 역사적으로 군사력이라는 하드 파워가 아니라, 문화라는 소프트 파워에 의존하여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관리해 온 전통’을 운운할 때는 허탈함을 넘어 두려움을 느꼈다. 오로지 소프트 파워에만 의존했던 송나라가 동북아 국제 질서에서 어떤 처지였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렇지 않기를 기대하지만, 이러한 시각과 역사 의식이 현재 한국 통치 세력의 보편적 인식이라면, 안개 속 같은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이 돌파구를 찾기는 요원해 보인다.

저자가 주장한 중미일 각국과의 협력관계에 있어서, 원론적으로 한국이 중미일 삼국 사이에서 줄타기와 같은 외교를 해야 하며 중국이라는 원심력에 휩쓸려 들어가지 말아야 함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또한, 대북관계에 있어서, 지속적인 교류와 협상을 통한 견인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은 주목된다. 그렇게 볼 때, 각론의 수준에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는 지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원한 것은 없는 국제 관계에서 적과 동지를 구분하는 기준, 즉, 우리의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서 저자의 의중이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다. 각론에 대한 논의가 의미 있는지 잘 모르겠다.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힘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안일함은 지적한 바와 같다.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 선택을 요구 받은 지금의 상황을 저자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럼에도, 전쟁의 패러다임은 소멸 중이라 하였으니, 군사적,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한 분석이 안일한 것은 그 때문이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무역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한중미일 4국 간 무역 관계에 대한 분석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저자에게 묻고 싶다. 중국이 전통적으로 문화의 힘으로 동북아 질서를 유지했다고 치고, 중국과 미국이 전쟁이라는 구시대적 패러다임을 내려놓고 무역이라는 새 패러다임을 통해 관계를 맺고 있다고 치고. 그래서, 일본이 한반도에 군사 상륙을 암시하고, 미국과 중국이 남중국해에서 패권을 놓고 대립하고 있으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무역협정(TPP)이 체결된 이 때에, “한미동맹, 한중협력, 한일교류”를 통해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자는 것인가?
 

박상희 (예로니모)
서강대 사학과 박사과정에 있으며,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가르치기도 한다.
다섯 살짜리 꼬맹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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