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5]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일상생활에서 이 질문을 하면 돌아오는 답은 대부분 ‘아니다’다. 생물학적 몸은 매 순간 늙어가니 변한다는 것이 맞는 답이지만, ‘사람이 변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이 되지 못한다. 이 질문에서 사람은 ‘성격이나 기질’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물론 더러 바뀌는 경우도 있다.

바뀌어 안 좋은 경우만 짧게 언급해 본다. ‘사람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가 경험이지만 요즘 뉴스에서 자주 보는 고위 관료, 특히 교육 관료와 폴리페서들은 정권에 따라 소신을 자주 바꿔 세간의 이 ‘상식’을 뒤집는다. ‘많이 배우면 다 그리 변하는 재주도 많으냐’는 말을 들을까 걱정할 정도다.

‘이들은 옛날에 어떤 일을 보고 명백한 도둑질이라더니 오늘날엔 해석을 달리 할 수 있다고 한다. 옛날엔 강도질이라더니 이제는 구국의 결단이라고 한다. 과거 강한 놈들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렸던 일을 한 때는 부끄러운 척이라도 하더니, 이제는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되레 삿대질이다.’ 도둑놈도 자식한테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데, 교육을 책임진다는 사람들이 유분수지, 조변석개하면서 이리 사람을 헛갈리게 해도 되는가!

▲ 신비체험을 여러 번 경험한 것으로 알려진 예수의 데레사.(대 데레사)(이미지 출처 = pt.wikipedia.org)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 이유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 같은 경우를 보면 ‘두려움’이 큰 원인 가운데 하나인 것 같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만일 이제까지의 상황이 달라지면 나의 미래는 온전할까? 만일 새로운 선택이 이제껏 지켜 오고 살아왔던 것보다 더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함께할 이 사람들을 믿을 수 있을까? 다들 변할 텐데....”

오래 살다보니 이 두려움 이면에 ‘절대적 진리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다’는 ‘완벽주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러 발 늦더라도 올바로 된 것을 골라야 더 빨리 가고 또 후회가 없다. 그러니 돌다리를 두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시 놓을 자세로 완벽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그러나 이런 완벽주의를 만족시켜 줄 행운은 내게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모세처럼 떨기나무에서 타지 않는 불을 보지도, 사무엘처럼 비몽사몽 간에 들려오는 천사의 음성도 듣지 못했다. 기도 중에 환시와 환청을 보거나 듣지 못하였다. 남이 내게 예언을 하거나 신탁하는 경우도 없었다. 소소하게 소명 체험으로 볼만한 작은 일들이 더러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도 사는 동안 희미해졌다.

나는 이런 체험이 있으면 많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랬듯이 두렵고 싫으면서도 하느님이 인도하시는 길로 가긴 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길이 험난하고 또 비극적인 종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세월만 갔다.

돌이켜 보니 나의 완벽주의에는 세 가지 맹점이 있었다. 첫째, 내가 기대하는 경험을 한 신앙인들은 전체 교회사 안에서 손에 꼽을 만큼 적었고, 설사 경험을 했더라도 그들 인생에서 몇 번 되지 않았다. 그러니 바랄 수는 있지만 이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될 일이었다. 둘째, 이 기대를 낮추면 소소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들이 많았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식별하기에는 충분한 계기들이 많았다. 그러니 답이 불완전하더라도 붙잡고 씨름을 했어야 옳았다. 마지막으로, 이런 자세로는 설사 그 순간이 왔더라도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그랬듯이 그 계시를 믿지 않고 거부했을 것이다. 불행히도 내겐 이를 알아볼 수 있는 ‘겸손하고 낮은 눈’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새롭게 선택하게 된 방식이 ‘적정성의 원칙’이다. 이는 절대적 확실성과 다소 거리가 있지만 ‘선택과 실천’이 쉬운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이 원칙이 갖는 장점은 ‘다른 이들의 경험과 지혜’를 빌릴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점이다. 또한 신앙생활에서 늘 강조해왔던 나의 결정에 ‘하느님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는 겸손한 자세를 갖기가 쉬워지는 점이다.

이 원칙으로 바꾸고 나서 나는 모든 사태에 대해 적정주의로 접근하고 있다. 나의 습관대로라면 부르심으로 이끌릴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 가능성으로 자꾸 움직여 가다 보면 관성의 힘이 약해지고 대신 새로운 선택의 힘이 강해진다. 이런 경우가 쌓여 갈수록 이 선택을 잘 할 수 있는 힘과 안목이 생긴다. 이렇게 계속 가다 보면 이전의 나와 많이 달라진 자신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사실 ‘절대적 경험’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그리 바랄 일은 아니다. 만일 절대적 경험이 나를 계속 이끌게 되면 나의 자유의지는 쓸모없게 되고, 그리스도교의 신은 무속의 신이 돼 버린다. 사실 절대주의도 일단 표현하고 나면 내가 사는 세계 안에서는 상대적이 되어 버린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법칙에 종속되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아예 상대주의에서 출발해 좀 더 확실성을 갖는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여 나가는 것이 낫다. 그러다 큰 은총이 다가오면 감사하면 되고, 설사 이 순간이 다가 오지 않더라도 부족한대로 내 몫을 다하면 될 일이다.

다행히 위로가 되는 일은 예수께서 당신의 절대적인 뜻을 이미 당신 말과 행동, 즉 ‘복음에 다 담았다’고 말씀하신 점이다. 이미 당신이 완벽한 하느님의 계시이고, 또 하느님 자신임을 밝히셨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그분이 가르치신 대로 실천하면 될 터. 그리고 욕심 부리지 않고 그분이 사랑하라 하신 이웃을 섬기다 보면 어느 순간 그분도 알아보게 될 터.

해서 이제는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와 그 가운데 나와 같은 방향으로 식별력을 키워 온 형제자매들과 공동 식별을 통해 완벽하진 않지만 좀 더 확실한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고 있다. 그 결과 다행히 선택의 순간을 놓치는 일이 과거보다 훨씬 적어졌다. 그리고 이를 잘 뒷받침하기 위해 매일 ‘침묵의 시간’을 갖고 있다. 이 침묵이 나의 ‘적정주의’(optimalism)를 보완하고 있다.

이제까지의 경험에 미뤄보면 이런 침묵을 통한 자기 관조의 시간(혹은 기도의 시간), 동시대 지성들을 통한 식별의 공유와 도반이 가까이 있는 공동체가 ‘사람을 잘 변하게 하는 삼대 조건’이라는 생각이다. 아마 이렇게 살다 보면 시류에 편승하여 소신 바꾸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일을 안 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앞으로도 난 이렇게 살려 애쓸 것이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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