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10월 25일 (연중 제30주일) 마르 10, 46-52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께 외치는 소리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사랑(慈)과 연민(悲)을 말합니다. 영어로 자비는 “마음으로 아파함”(sorrowful at heart)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바르티메오의 외침에는 나의 아픔을 헤아려 주시고, 나의 아픔과 고통을 덜어달라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대답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참 간절하게 들립니다. 이 사람은 예전에 볼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 간절함에 예수님의 치유의 힘이 내립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병자들을 낫게 해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입니다. “내 능력이 너를 낫게 했다”가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서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죄 많은 여인에게도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사마리아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자리는 우리 안의 "믿음"이라는 마음자리입니다. 그래서 토머스 머튼은 "믿음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힘으로 표출된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바로 하느님의 힘을 부른다는 겁니다. 그 분께서는 볼 수 없는 내 눈을 보게 해주신다는 믿음. 하느님의 은총은 그분께 대한 우리의 의탁과 신뢰에 대한 자애로운 응답입니다.

오래 전 형제들과 함께 지리산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하루 산행을 하고 잠들기 전에 잠시 밖으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두 눈을 뜨고 있어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눈을 감아봤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볼 수 없었고, 눈을 감아도 볼 수 없는 상황. 오히려 눈을 감고 있을 때가 마음이 편했습니다. 질문 하나가 떠 올랐습니다. 우리는 눈이 있어야 보는 것인가? 아니면 빛이 있어야 보는 것인가? 물론 눈이 있어야 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무엇 때문에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일까? 두 눈인가? 아니면 빛인가?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입니다.” (요한 8,12)

생각해보니, 내가 무언가를 볼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내가 안다고 말 할 수 없고, 그 대상이나 현상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 본다는 것은, 단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육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라, 그 무엇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한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빛이 있어야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사진 출처 = pixabay.com
미국 예수회원 중에 로렌스 길릭(Lawrence Gillick)이란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8살 때 말에서 떨어져 다친 뒤로 앞을 볼 수 없습니다. 몇 년 전에 한국에 오셨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형제들로부터 듣기로, 길릭 신부님은 공동체에서 누구보다도 가장 잘 보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분이, 두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잘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역설이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분이 가장 잘 볼 수 있다니.... 나는 비록 눈이 멀지 않았지만, 제대로 보는 것일까? 투명하게 보고 있는가?

바르티메오는 눈이 뜨이고 “다시 보게” 됩니다. 캄캄한 그의 두 눈에 환한 빛이 들어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의 두 눈을 뜨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지평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그동안 닫혔던 눈이 뜨이자 바르티메오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눈을 뜬 뒤, 그의 삶의 이야기는 더 이상 복음에 나오지 않지만 그는 새로운 삶을 살아갔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새로운 관점으로....

바르티메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시는지 알게 됩니다. 닫힌 눈을 열어주신다는 것. 주변의 것들을 새롭게 보게 해주신다는 것.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아픈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주신다는 것. 오늘 첫째 독서에서 말하듯이 “내가 그들을 위로하며 이끌어 주리라.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 길을 걷게 하리라.”(예레미아 31,9) 하느님은 그런 분이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연민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하느님이신지요.

저희들 살아가면서, 내 안의 약함과 가난함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싶습니다. 나의 약함과 가난함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께 더 의탁하게 되고 그분의 뜻에, 그분의 마음에 더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바르티메오는 자신의 약함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약함과 가난함은 그분을 통해 단단해지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우리가 괜찮지 않다는 것,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 우리가 결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이 깨어짐의 순간이 필요하다. 죄의식의 순간, 회개의 순간,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만족감을 줄 수 없는 순간이 우리의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다." (공지영, "상처없는 영혼"에서)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격주로 강론을 나눌 수 있도록 초대해주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매번 글을 보내면서 부족함이 느껴졌고 부끄러운 글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비로움과 은총의 힘으로 맑은 눈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고맙습니다. 최성영 신부 드림.

이번 글로 최성영 신부님의 강론을 마칩니다. 1년 동안 지금여기 강론대를 맡아주신 신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최성영 신부 (요셉)
서강대학교 교목사제
예수회 청년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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