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역사는 하나입니다. 국정교과서 찬성’

상처라는 것이 참 무섭구나. 붉은 글씨가 새겨진 그 현수막을 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집 근처에 베트남 참전용사기념회에서 지은 건물 하나가 있다. 그 건물 앞엔 늘 꽤나 시의성 있는 현수막이 걸린다. 어쩜 이렇게 일관적인 방향을 가리킬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로, 예상된 충성스러운 문구와 함께. 무엇이 그들의 역사관을 하나로 만들었나? 이것은 일종의 짙은 흉터였다.

세대라는 이름의 상처

‘세대’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이와 같은 결과가 나온다.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부모 일을 계승할 때까지의 약 30년 정도 되는 기간’. 독일 역사주의, 정신과학의 창시자 딜타이는 이렇게 덧붙였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기에 어떤 큰 사건을 만나 그 사건의 강력한 영향을 받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 곧 같은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서 다소 공통적인 데가 있고, 또 행동양식도 공통적이다’. 한 세대가 무조건 비슷한 가치관을 갖는다고 하기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세대라는 단어의 정의를 통해 비슷한 경험을 지닌 사람들은 비슷한 성향을 갖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 경험이란 대개는 상처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 정도의 아픔이요 ‘한’이다. 이것은 쉽사리 건드리기 어려운 아픔이라서 이성적, 객관적 토론이 힘들고 거의 바뀌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참 재미있는 나라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3대가 한 집에 사는 나라다. 일제 강점기 세대, 전쟁 세대, 산업화 세대, 민주화 세대, IMF세대, 정보화 사회 세대 등 다양한 세대로 분류될 수 있는 사람들이 동등한 한 명의 유권자로 존재한다. 상처의 골이 깊을수록, 마치 경계선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없도록 가로막는다.

정치는 소독된 손으로 상처를 건드려야 한다

▲ '히포크라테스의 판화', 루벤스.(1638)
한 사회에서 정치가 중요한 까닭은, 정치기관은 이러한 상처들을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끌고 와 다룰 능력과 정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식 입장에서 앞뒤 꽉 막혔다고 여겨지는 부모에게 객관적인 비판을 하기 힘든 이유는 그 꽉 막힘이 상처에서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만 펼치는 친구에게 논리를 들어 따지기 어려운 이유는 그 친구의 시야를 좁힌 것이 감당하기 힘든 아픔에서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그 상처들을 어루만지라고, 내가 내 부모에게, 그 친구에게 할 수 없는 말을 공적 영역에서 해 달라고, 공적 기관에 우리의 주권을 일부 위임했다.

깊은 골을 메우고 높은 산은 깎아 내려 마침내 우리가 서로의 손을 뻗어 잡을 수 있기를 바랐기에. 그런데 현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환자의 병을 더 키우는 악독한 의사가 꽤 많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슬프게도 한 사람의 인생을 짓눌러 왔던 상처가 누군가에 의해 이익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으매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하얀 가운을 입으며 했던 그 맹세는 어디로 갔는가. 겸허한 맹세와 함께 소독했던 그 손은 왜 그렇게도 더럽혀졌는가.

상처를 이용하는 사람,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

지난해 흥행했던 영화 ‘국제시장’에 몇몇 사람이 비판을 제기한 이유는, 이 영화를 한 세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인간적인 이야기보다는 한 세대의 상처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감성팔이 수단으로 봤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비뚤어진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생각해 볼 가치는 있다. 우리의 대통령을 한 인간으로 바라봤을 때, 그다지 행복한 청년기를 보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그녀 역시 누구보다도 아픈 상처로 둘러싸여 그녀의 인생관을 형성해 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 자신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유권자는 그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교과서 국정화는 누군가의 상처를 이용하고, 누군가의 상처를 더 아프게 하고, 누군가의 상처가 개입된 사적 영역의 공공화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딸, 그 아버지의 위상이 드높아져야 자신의 과거가 헛되지 않았다 합리화되는 세대, 그로 인해 거리에 나가 최루탄과 곤봉에 희생되었던 누군가의 희생은 헛되이 평가 당할 수 있는 세대가 복잡하게 엉켜 있다. 답은 간단하다. 서로 다른 시각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녹아 들어 있어야 한다. 누군가의 상처가 더 과대평가되거나 과소평가되지 않도록, 사실에 근거하되 이해의 가능성의 폭을 넓혀 두고 함께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가능성을 권력으로 막으려는 그녀를 보며, 상처에서 평생을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는 오직 ‘진실’로써만 가능할 텐데, 허물은 인정하고 그 허물로 상처받은 사람과 함께 아파할 수 있어야 비로소 진정한 치유가 가능할 텐데. 그저 가리려고만 한다면 그 상처는 더욱 곪아 터지고 말 것이다.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게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우리의 대통령이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가운을 입을 적에 했던 맹세를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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