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프란치스코 교종은 방미 중에 9월 24일 미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미 의회는 미국의 얼굴로서 상처받기 쉬운 연약한 국민을 돌봐야 한다”고 말했다. 교종은 모세가 유대인을 자유의 땅으로 인도했듯이 “미 의회는 공정한 입법으로 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언론들이 이날 “교종이 미국 정치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고 보도할 만큼 교종은 의회 연설에서 이민자 문제, 사형제도 폐지, 빈부격차 해소와 환경문제에 의회가 나서 줄 것을 공개적으로 주문했다. 이날 프란치스코 교종이 미국의 위대한 영혼으로 거론한 사람은 네 사람이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링컨 대통령을 자유의 수호자라며, “종교, 이데올로기, 경제시스템이란 이름을 빌려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증오가 그 자리를 차지하거나 흑백론이 지배해서는 안 된다”면서 “희망과 치유, 평화와 정의를 통해 협력과 화해의 메시지를 새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를 통해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꿈꿀 수 있게 하는 문화”를 요구했고, 도러시 데이처럼 사회 정의와 억압받는 이들을 위해 노력하고, 토머스 머튼처럼 평화를 위해 소통하고 하느님을 향한 열린 자세를 가지라고 요청했다.

예언자의 반열에서 울려 퍼지는 복음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종

교종이 지목한 인물은 한결같이 신앙을 사회적 실천과 접목시킨 예언자적 인물이다. 토머스 머튼은 예수가 세례자 요한의 계보를 잇는 예언자의 반열에 서 있듯이, 모든 수도자는 당연히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가운데서 시작되었다는 선포처럼 위대한 예언은 없다. 그리고 다른 예언자들처럼 예수는 당대의 권력자들에게 살해당했다. 생전에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던 예수는 자신의 말처럼 십자가에서 행복했다고 믿는 게 신앙이다. 참행복은 가난하고 슬퍼하고 박해받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가운데 주어진다고 스승 예수는 믿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은 ‘요나의 표징’이라는 그의 편지에서 “오늘날 복음의 약속은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깊은 정치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처럼 프란치스코 교종은 가장 정치적인 발언을 통하여 가장 복음적인 메시지를 미국 사회의 지도층에게 전달한 것이다.

미국의 극우 대중매체인 <폭스뉴스>가 프란치스코 교종을 ‘거짓 예언자’라고 연일 비난하는 가운데 행해진 교종의 의회 연설은 골리앗을 향해 던져진 다윗의 돌팔매였다. <폭스뉴스>는 교종이 너무 세속적인 데 관심이 많고, 무신론 좌파들의 정치적 주장을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덧붙여 뉴욕의 세인트패트릭 대성당을 아름답게 수리한 것도 미국의 부유한 자본가였고, 그들이 일구어 낸 자본의 일부를 교회에 주고 있다는 점에서 교종을 은인을 몰라보는 ‘배신자’로 낙인찍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더군다나 내년에 미국사회는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교종의 이런 발언들은 미국 민주당을 옹호하는 ‘사전선거운동’처럼 보여 더욱 ‘정치논란’이 거칠게 나온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눈물을 흘리게 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킨 분이 프란치스코 교종이다.

▲ 2014년 2월, ‘부정선거 불법당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가 열린 서울 신수동 예수회센터 입구에서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 회원 50여 명이 항의 집회를 열었다. ⓒ정현진 기자

대수모는 왜 교종의 좌파적 교회론을 비난하지 않는가?
추기경 옹호하면서 사제들 비난하는 모순

이런 프란치스코 교종을 따르는 이들을 한국사회에서는 ‘친북, 반미, 반정부 정치사제’라고 부른다. 약칭 ‘대수천’이라 부르는 ‘대한민국수호 천주교인모임’(이하 대수모)에서는 광주대교구 김희중 대주교와 제주교구 강우일 주교, 수원교구 이용훈 주교를 포함해서 정의평화위원회 활동을 하거나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에 동조하는 이들을 싸잡아 ‘정치사제’로 부른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교회 안에서 정치사제들을 ‘퇴출’시키자는 것이다. 이들은 정의평화위원회를 ‘불의갈등위원회’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들이 프란치스코 교종을 ‘정치교황’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천명한 평신도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정치사제’들에게 복종하지 말고, 이런 본당에는 교무금과 헌금도 내지 말라고 부추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이들이 정진석 ‘추기경’의 용퇴를 주장한 사제들을 비난하면서, 이들과 정치적 지향이 다르다고 판단한 ‘주교’와 ‘사제’들의 퇴출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종을 거부하는 것은 본인 스스로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지 않다는 증거가 되므로 자제하고 있는 형국이며, 한국교회의 교도권에 대해서는 정치적 지향을 잣대로 삼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들은 지역교회를 폄하하고 로마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으며, 교종이 그렇게 비판하시는 ‘웰빙-번영신학’에 사로잡혀 있다. 이들이 수호하고 싶어 하는 ‘대한민국’은 박정희, 박근혜의 대한민국이다. 그리고 이들이 섬기는 하느님은 이명박 류의 개발주의자들이 섬기는 우상이다. 이들 식으로 말하자면, 교종이 늘 강조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처럼 좌파적 교회론은 없다.

이들은 사제권위에 눌려 있지 말라고 평신도들을 부추기면서, 한편에선 일부 성직자들의 권위에 매달려 있다. 이들이 한사코 군종출신의 부산교구 김계춘 신부와 예수회의 박홍 신부, 이한택 은퇴 주교, 오웅진 신부 등에게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계제도에서 비교적 비껴나 있지만 그래도 주교이고 사제라는 점에서 ‘천주교단체’로서 효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인지 묻고 싶다. 그렇지만 복음적 판단은 사라지고 정치적 판단만 남아 있는 단체를 ‘천주교’단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교회의에서는 주교단에 속한 주교들과 사목 일선에 있는 사제들을 ‘독재자’라고 비난하며, 퇴출을 요구하는 이들을 어떻게 이해할까? 이들은 한사코 이승만과 박정희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이를 계승한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를 ‘대한민국’과 동일시한다. 이들이 지키려 하는 것은 수구세력의 기득권일 뿐 복음이 아니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도록 요청하기 때문이다.

천주교 정치단체 ‘대수모’.... 언어폭력 감추지 않아

교도권에 대한 일체의 존중심도 찾아볼 수 없는 ‘정치단체’에 불과한 ‘대수모’에 대해서 주교단은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는지 묻고 싶다. 주교단과 주교회의 소속 기구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소속 사제들을 지키는 한편, 교구 신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교구장 주교 역시 자신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야 한다. 예전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매일미사>와 관련한 비판기사를 실었을 때 주교회의 사무처의 책임사제가 ‘가톨릭’이라는 명칭을 자발적으로 삭제해 줄 것을 구두로 요청한 적이 있다. <매일미사>처럼 주교회의의 직접적인 재정적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문제라서 ‘대수모’의 문제를 주교회의가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하지만 교회는 이익단체가 아니라 ‘신앙공동체’이며, ‘대수모’ 문제는 신앙공동체의 정체성과 관련된 사안이기에 중대하다.

‘대수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이들의 언어가 지극히 원색적인 선동적 정치 언어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이들이 퇴출운동을 벌이고 있는 분당 성 마르코 성당의 김기창 신부에 대해 ‘친북반역신부’, ‘북한 앞잡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있는데, 이들이 보기에 현재 한국교회는 ‘빨갱이 종교’인 셈이다. 이들이 전하는 교회개혁은 이런 빨갱이 주교와 신부를 퇴출시켜 교회를 정화하고, 대한민국 수호에 걸맞는 교회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참된 교회’란 ‘어용 교회’와 다르지 않다. 복음이 지닌 신선한 활력,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 자비를 찾아보기 어렵다. 북한 방송이나 <TV조선>에나 등장할 만한 자극적인 언어를 즐겨 사용하는 이들이 스스로 ‘애국세력’임을 자처하고 있다. 서북청년단을 연상시키는 ‘대수모’의 언어는 폭력적이다. 시국기도회를 방해하기 위해 ‘대수모’와 함께 성당에 난입한 무리들 가운데 장난감 권총을 소지한 자도 있었지만, 언어폭력도 폭력이다. 이런 점에서 천주교뉴라이트에서 시작된 ‘대수모’는 ‘정치노인’들의 ‘가톨릭판 일베’다.

애국보다 중요한 복음
“부국강병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 토머스 머튼, "머튼의 평화론", 조효제 옮김, 분도출판사, 2006
토머스 머튼은 ‘승리 없는 평화’를 이야기한 적이 있다. 전쟁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비극이라는 관점이다. 전쟁 자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기증강이나 해군기지 건설이 아니라 교회는 먼저 ‘민족화해’를 요청해 왔다. ‘부국강병’은 결코 평화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빈민을 억누르며 부국강병을 요청했던 유대의 멸망을 예언했다. 토머스 머튼은 자신의 소명을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도 세상을 경멸하여 등을 돌리는 것도 아닌 기득권자들이 주입시키는 환상의 가면을 벗기는 일이라고 했다. 정말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면, 그 나라의 백성들의 삶을 돌보아야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아픈 이들이 행복해야 그 나라가 행복하다. 그 나라가 행복해야 누구든지 그 나라를 수호할 이유를 발견한다. 2015년 유엔의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158개국 가운데 가장 행복한 국가로는 스위스가 선정되었고, 우리나라는 2013년보다 6단계 떨어진 47위를 기록했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이 앞장서서 세상의 모든 가련한 인생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다. 교종은 복음의 눈으로 정치를 바라보고 행동한다. ‘대수모’처럼 정치적 이해관계로 복음을 왜곡하지 않는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묻고 있다.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인가?” 강도를 만나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 되어 돌보았다. 오늘날 교종과 한국교회의 많은 사제들은 복음서 이야기의 제사장과 레위처럼 피해 가지 않는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상처받고 슬퍼하는 이들 곁에서 머물러 있고자 한다. “고통받는 형제 앞에서 중립은 없다”는 교종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형제가 고통받는 현장을 ‘거룩한 곳’이라 하고, 어떤 이는 ‘정치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곳을 성화하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자비 안에 있다면 그곳은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장소이며, 정치조차 ‘공동선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 지금 교종은 정치적인가? 정치적이다. 아름다운 하느님의 정치는 그렇게 지금여기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가난한 백성과 겸손한 사제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대수모’는 하느님 앞에서 반드시 수모를 겪을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