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마음에 새기는 복음의 기쁨-9]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마태3,7-10)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 따로 있겠지만, ‘독’이 있는 뱀을 싸잡아서 ‘독사’라 했을 것이며, 그 뱀에 물리면 그 독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두고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단서가 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는 것,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조건부 세례(?)’를 주었다 하더라도, ‘독사의 자식들’이라 부를 것까지 있을까? 그냥 짐작만 할 뿐이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 그들한테 걸리면 죽는다는 뜻이겠다. 어쩌면 세례자 요한은 무던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세례를 베풀지 않고 돌려보냈을 텐데, 그래도 세례를 준 것을 보면 말이다. 세례를 받은 율법학자와 사두가이는 회개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고 알곡이 되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독사의 자식’이란 독설을 들을만한 이들은 여전했던 것 같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입에서조차 가끔 거친 소리가 쏟아져 나오는데, 주로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을 향한 발언이다. 심지어 그들이 ‘과부의 등을 쳐 먹는다.’라고까지 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한다.”(마르 12,40)

 
<복음의 기쁨>에도 ‘독’이란 단어가 나온다. 우선 교회의 사람을 두고 ‘독’을 말한다. 교회의 사람들이 “복음화 과업을 마치 (자신의 자유로운 생활에) ‘독’이었다는 듯이 생각합니다.”(81항) 그리고 이는 “모든 위협 가운데 가장 큰 위협”인 “교회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회색빛 실용주의”로 이어지며, 그리스도인들을 “박물관의 미라”(83항)로 변형시킨다.

교회의 사람들에게도 물론 ‘자유로운 여가생활’이 필요하다. 굳이 창세기 하느님의 ‘안식’을 말하지 않더라도, 사목의 열정과 창의력을 위해서도 ‘여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복음화 사명’을 위한 ‘여가’여야 한다. 뒤바뀌면 곤란하다. 곤란함의 심각성은 그 뒤바뀜이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자기 안에 갇혀 있는 것은 ‘내재’라는 쓴 독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기적 선택 때문에 인류는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87항) 물론 이 문장의 ‘휴머니티(humanity)’를 ‘인간성’으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광야에서 역사의 순례를 하고 있는 인류가 마실 샘물이 되라는 하느님 백성의 소명"(86항)을 염두에 둔다면, ‘인류’라고 번역해도 무방할 것이다.

<복음의 기쁨>은 세상의 경제를 두고서도 ‘독’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의 주류 경제 모델이 ‘독’처럼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것도 시장자유주의 경제 옹호자들이 말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들과 볼 수 없는 손’을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오늘날의) 경제는 더 이상 처방을 내놓을 수 없습니다. 경제가 내놓은 처방들은, 노동력을 감소시키면서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것과, 그럼으로써 배제된 이들의 대열에 (사람들을) 합류시키는 것 같은 처방들은, ‘새로운 독’입니다.”(204항) 사실 경제 정책들은 대부분 시장의 실패에 대한 처방들이다.

우리는 ‘노동력을 감소시키면서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현상을 매일 경험한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경제 활성화’라고 부른다. 아주 점잖게는 ‘노동시장의 유연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경제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규제를 ‘암덩어리’라고 규탄하며 척결하겠다고 나선다. 얼핏 듣기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현실은 수많은 ‘노동’이 배제되고 심지어는 ‘죽음’으로 내몰린다. 그래서 ‘새로운’ 독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교회 안팎에서 ‘독’이 퍼지고 있다. 세례가 필요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보아야 한다.


박동호 신부
/ 신정동성당,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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