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아산시 봉곡사(鳳谷寺)는 조선시대에 태어난 선각자 두 사람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다. 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불교를 지킨 ‘만공 선사’다. 그는 1937년 총독부에서 열린 조선 31본산 주지회의에 마곡사 주지로 참석했다. 일제의 칼날이 서슬 퍼렇게 한반도를 지배하던 시대다. 회의를 주재한 조선 총독 미나미는, 사찰령을 제정해 승려가 아내를 두게 하는 등 한국 불교를 왜색화한 전임자 데라우치 총독을 칭송했다. 참석자들은 총독의 권세에 눌려 아무런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만공 선사가 미나미 총독 앞에서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나 “조선 승려들을 파괴시킨 데라우치 총독은 지금 죽어 무간지옥에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를 구하고 조선 불교를 살리려면 일본 총독부가 더 이상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말라.”고 포효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 봉곡사는 조선 승려의 기개를 보여준 만공 선사가 1895년 25세의 나이로 득도(得道)한 곳이다.

또 한 사람은 1795년 34세의 나이로 정3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른 엘리트 관료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같은 해 4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전교를 하다 발각되자, 이를 빌미로 천주교 신자들을 공격하던 공서파(攻西派) 서용보 등이 모함해서, 정약용은 종6품의 금정찰방으로 6계급 강등되어 지방으로 좌천된다. 그 추운 겨울에 정약용은 성호 이익의 제자 13인과 함께 깊은 산골 봉곡사에서 열흘간 강학회를 열고 스승의 유저(遺著)를 정리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분노와 슬픔에 기가 꺾일 상황이었지만 학문을 향한 다산의 꿋꿋한 정진은 멈추지 않았다.

▲ 봉곡사 가는 길목. ⓒ이장섭

만공의 강인함과 다산의 초연함이 주련(柱聯)처럼 걸려있는 봉곡사를 나와 100여 미터 아래로 내려오면 '점뜸'이란 지명의 땅이 있다. 이 지역은 박해시대에 천주교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관군의 눈길을 피해 천주교인들이 옹기점을 하며 이곳에 숨어살았다고 한다. 나는 이 마을에 살게 된 이후, 진리를 찾아, 학문의 탐구를 위해, 그리고 신앙을 지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해온 선인(先人)들과 함께 날마다 새로운 아침을 맞는다. 창문을 열면 지금도 그들의 고뇌와 아픔, 그리고 그것들을 극복해가던 그들의 신념과 열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어쩌면 그들이 살았던 시절의 조선의 모습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낙원에서 쫓겨난 인간들은 여전히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위해 이전투구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의 존엄함을 노래하고 자유를 추구하던 사람들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타락한 삶들을 이겨낼 희망을 찾아 끝없는 정진과 유랑을 감내해 왔다.

아마도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필요한 것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라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햇빛이 가려지고 있으니 비켜 달라.’고 한 것도 세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러한 용기 덕분이었을 것이다. ‘한밤에 몸을 누일 통 하나만 있으면 되고, 일용할 양식을 얻을 옹기 가마 하나면 충분하다.’라는 각오로 치열하게 진리와 자유의 삶을 모색하던 사람들이었기에, 불의를 보면 목숨을 걸고 할 말을 하였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의 생명과 같은 가치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되새기며, 오늘도 봉곡사 가는 길을 걷는다. 하늘을 가리고 높이 솟은 소나무 가지 사이에서는 신비스런 빛이 쏟아져 내린다. 저 빛 한 줄기만 있다면, 우리도 모든 비열함과 천박함을 벗어버리고 작은 통 속의 큰 자유를 노래하는 시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장섭
/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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