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태풍 찬홈이 올라오던 주일날 미사를 드리고 본당 신자들과 함께 지팡이 대신 반두와 투망을 들고 신발 대신 슬리퍼를 신고 어부의 자세로 시골 냇가와 도랑을 찾아갔습니다. 태풍이 막 우리나라를 지나가는 날이라서 그런지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었습니다. 비바람에 벼들이 춤을 추는 가운데 저희는 한쪽 도랑에서 미꾸라지며 메기며 논우렁이를 잡고 한쪽 강가에선 피리며 꺽지를 잡으며 신나했습니다. 비와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 서 있을 때의 자유로움은 그 속에 뛰어든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아닐까요? 아무 것에도 매여 있지 않은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안에서 매여 있는 많은 부분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신발 외에는 옷도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하셨는데 자꾸만 불안합니다. 음식도, 돈도 좀 있어야겠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좀 챙겨야겠고요. 그분께선 오로지 지팡이만 들고 가라시지요. 하느님의 지팡이입니다. 하느님의 권능과 하느님의 힘입니다.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길을 가라십니다. 또 신발은 신고 가라십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발에 신을 신겨주지요. 당신 아들로 받아들이겠다는 아버지의 의지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의 신분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신발을 신는 것은 종이 아니라 주인의 자세가 된다는 말이고, 아버지 아들의 신분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믿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되 하느님 자녀의 신분으로 자유롭게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라는 명령입니다. 그냥 믿고 살아가는 것이 어찌나 불안한지 우리들은 자꾸만 재어봅니다.

▲ <제자를 가르치는 예수>
거기에다 한 말씀 덧붙이십니다. 어느 곳이든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을 보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곳을 떠날 때에는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합니다. 제자들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음을 거부했던 그 사람이 벌을 받든 상을 받든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몫으로 남게 됩니다. 복음을 살아감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이제 남은 판단은 나의 판단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우리는 지난 일에서 좀 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일에서 어떤 아픔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제 내가 그 일을 되돌릴 수 없다면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우리는 자유인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한평생을 자신의 발밑의 먼지를 털어내지 못하고 한을 품고 독을 뿜어내는 국가의 지도자를 봅니다. 쉼 없이 말을 뒤집고 자신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는지조차 맥없이 무시해 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나랏님'처럼 행세하는 그 지도자는 자신에 대한 얼마나 많은 보호본능 속에서 살아왔을까요?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지켜 주지 않는다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짐작합니다. 혹시나 나를 배반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을 사람에게 나라의 책임을 맡기는 일이 얼마나 불행한지 지금 목격하고 있습니다. ‘예’ 할 것은 ‘예’ 하면 되는 것이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면 되는 것인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찌나 그리 불편할까요? 그리하여 한편으로 측은한 마음까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저의 감정인가 봅니다.


신종호 신부
 / 정평성당 주임, 대구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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