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9월 27일(한가위) 루카 12,15-21

우리 조상들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이 풍요의 계절, 달 밝은 날을 택하여, 수확한 곡식과 과일로 차례 상을 차려 놓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베푸심이 있었기에 후손인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드렸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수확한 풍요로움이 은혜롭다는 사실도 마음에 새겼습니다. 설과 한가위, 우리나라의 두 큰 명절을 보면, 베풀어진 것에 대한 감사가 신기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 명절에 행해지는 큰 의례가 조상들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탈무드라는 이스라엘 랍비들의 문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이 곳곳에 다 계실 수 없어 어머니를 주셨다.” 어머니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읽으라는 말입니다. 그 말을 연장하면, 조상들에게 드리는 감사는 하느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이기도 합니다.

집집마다 친인척이 함께 모여,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합니다.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로 말미암아 맺어진 형제, 자매, 친척들의 인연입니다.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마음은 가족과 친인척의 은혜로움도 깨닫게 해 줍니다. 한가위에 형제자매와 친인척들이 함께 모여, 우리 곁을 떠나가신 집안 어른들을 기억하는 것은 조상들을 기점으로 우리 주변을 다시 보고, 그들의 사랑 안에서 가족과 친척들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인류역사가 있으면서 베풂의 역사는 시작하였습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면서 베풂의 역사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심이 된 문화권에서 발생한 언어입니다. 아시아의 문화권은 하느님이라는 단어 대신 하늘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하늘이 주신 조상입니다. 그래서 그 문화권은 효를 삼강오륜의 으뜸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는 단어도 씁니다. 하늘로 말미암아 발생한 인연이라는 말입니다. 효는 그 인연을 은혜로운 것으로 알고 감사드리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은 천생연분을 소중히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서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집안 어른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분들로 말미암아 발생한 형제자매를 소중히 생각하며 사랑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효자는 없습니다. 우리의 문화권이 말하는 효라는 덕목에는 하늘이 맺어 주신 인연들을 소중히 생각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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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는 큰 창고를 지어서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날 밤 그를 불러 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이러하다.’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좁은 시야에 갇혀서 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는 데에는 곡식과 재산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보람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복음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닌 시야에는 자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이 안락한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생명의 최대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주인공은 은혜롭게 베풀어진 자기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수확한 것도 베풀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가 가진 모든 인연들도 그에게는 소중하지 않습니다. 그 주인공은 베푸심의 흐름에서 스스로 이탈하여 유아독존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은혜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한 사람의 안일과 그것을 보장해 주는 재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소위 무원고립의 경지를 택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만을 보고,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생각은 단편적이라, 우리는 많은 순간에 그렇게 살기도 합니다. 이기심과 욕심이 자신을 눈멀게 하여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한 순간들이 자기에게는 없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에 따라 또 환경에 따라, 오늘 복음의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히 생각하고 이기적인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제자매들이 은혜롭다는 사실을 생각하던 이 계절에, 우리도 우리의 시야를 넓혀서 우리 주변을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셔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고, 또한 우리 주변의 생명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베풂과 은혜로움의 흐름에서 일탈하는 우리의 시선을 잠시 멈추고, 돌아가신 집안 어른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근본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살고 가신 분들도 하느님과 함께 사셨고, 지금은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옛날 모세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습니다. “선조들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탈출 3,15) 돌아가신 어른들을 위한 우리의 마음은 이제 기도로 표현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며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아직 살아 있는 우리도 그 은혜로우신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먹고 마셔서 기쁘기만 한, 한가위는 아닙니다. 돌아가신 집안의 어른들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신 사실을 다시 인식하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그들을 소중히 바라보는 오늘의 명절입니다.

그래서 즐겁고 행복한 오늘입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 안에 살아계신 집안 어른들이 계십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인연들입니다. 이 계절이 주는 풍요로움을 은혜롭게 보는 그만큼, 하느님을 기점으로 한 우리의 시야는 넓어질 것입니다. 우리와 유명을 달리하신 집안의 어른들과 더불어,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감사를 드립시다. 하느님은 오늘도 축복하고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축복과 그 사랑을 연장하여 우리 주변에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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