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가 본 교회와 사회 - 13]

밝은 빛은 그림자도 짙다. 오늘은 뜬금없는 말로 시작한다. 나는 이 말을 사람들의 도덕적 위선을 고발할 때나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한다고 느낄 때 사용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한순간에 사람이 달라지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대학시절 골수 운동권이라 자처하던 친구가 어느 날 정반대 노선을 걷는 정당에 들어가 천연덕스럽게 같은 편이었던 친구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 서는 경우가 첫 번째였다.

남들에게 심지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존경받던 인물이 어처구니없는 도덕적 위선으로 한 순간 명예가 실추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명성을 얻기 전에는 진보적 노선을 따르는 듯하다 유명해지자 슬그머니 우익 노선을 대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물론 여럿 보았다.

사진 출처 = www.flickr.com

올 초 우연히 오랜 만에 만난 수녀님이 내게 물었다.

“아직도 교회쇄신 운동을 하시나요?” “수녀님 아직도가 뭐에요? 옳은 일이면 계속 하는 거지.” “한 때 하다가 나이 들면 안 하는 분들이 많으시잖아요?” “아 그렇군요. 그런 분들이 계시죠.”
 

이 수녀님도 나 같은 경험을 자주 하다 보니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을 터이다.

이러한 예들은 아마도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욕망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설사 읽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내적 힘을 기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그가 본래부터 그랬는데 이제 본색을 드러냈을 뿐이라 말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이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당시에는 정말 그랬다고 생각한다. 다만 미처 자신 안에 있는 어두운 욕망을 읽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이들이 특별한 경우라 생각하지 않는다. 늘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실체에 걸맞지 않는 허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자아가 팽창된 이들은 언제든 이런 경우가 될 수 있다.

단체도 마찬가지다. 성과가 요란한 단체일수록 그리고 이 성과를 지속하는 단체일수록 그림자가 짙어질 가능성이 있다. 어려울 때도 문제가 생기지만 더 심각한 문제들은 햇빛이 한창일 때 생긴다. 하늘이 맑고 햇볕이 따가운 가을에 유독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뜬금없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요즘 보게 되는 한국 종교의 모습 때문이다. 개신교는 이미 빛과 어두움을 동시에 보여 주었다. 이른바 개신교의 장점이 단점으로 바뀐 경우를 이십 년째 보고 있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해도 남이 전혀 귀를 기울여 주지 않을 정도다. 앞으로도 개신교는 긴 세월 이런 어둠의 터널을 지날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개혁에 나서지 않는 한, 그리고 이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지 않는 한, 밝은 빛이 비추었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어둔 터널에 머물러야 하리라.

불교는 이런 세월이 오래되었다. 한때 국교의 위세를 누린 이후로는 늘 바닥이었다. 명암 가운데서 어둠이 더 길게 지배한 세월이다. 그러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워낙 바닥을 오래 기다보니 조금만 신통한 모습을 보여도 과한 칭찬을 받는다. 개신교가 하는 일에 비하면 손톱 크기만도 못한데 오히려 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이다.

한국에서 두 종교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보여 준 어두운 모습이 그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종교사 안에서 이런 과정을 안 거친 종교가 지구상에 없는 까닭이다. 가톨릭도 감추고 싶은 ‘흑역사’가 제법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종교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인이 그렇게 한다. 그러나 종교를 종교인과 분리할 수 없으니 종교는 피치 못하게 이런 한계를 안고 있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중생들이 지배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가? 내가 보기에 우리는 빛 한가운데 있다. 한국 종교들 안에서 보면 그렇다. 그래서 자신을 보기 어렵다. 밝은 해를 맨눈으로 보기 어려운 이치다. 게다가 경쟁자도 없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경쟁자들이 보통 이하이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이어도 남들 눈에는 한없이 높아 보인다. 여기에 교세에 기초하여 사회적 권력도 커졌다. 맘만 먹으면 국가도 움직일 수 있다. 물론 이 경우는 결탁/유착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그림자가 짙어진다. 그런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 밝은 빛에 취해, 짙어가는 그늘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2012년 한 심포지엄에서 ‘안정기 신드롬’이라 명명하였다.

안정기 다음에는 쇠퇴기가 기다리고 있다. 모든 조직이 다 그렇지만 안정기에 다음 단계인 쇠퇴기의 요소가 자라난다. 그래서 쇠퇴기는 안정기 중반에 시작된다고 보아야 한다. 관심 있는 신자들이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내용을 듣다 보면 안정기 신드롬이 더 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쇠퇴기에 나타날 부정적 징후들이 이미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우리가 위험한 이유는 우리도 과거 어두운 면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어서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도 200년 역사 안에서 지난 사십 년 잠깐 반짝 하고 있을 뿐이다. 현재와 같이 안일하면 이 밝은 빛 때문에 생긴 그림자가 우릴 공격할 것이다.

곧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는다. 개신교는 개신교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이 일을 다른 방식으로 기념할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 나을 뿐 월등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철저해야 한다.

이제 우리도 빛이 옅어짐에 따라 그림자도 옅어지는 하강 국면을 경험할 것이다. 이후에는 서서히 개신교가 걷는 것처럼 어둠의 긴 터널을 지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현재를 기회로 보아야 한다. 밝은 빛을 보지 말고, 그 빛으로 그동안 소홀했던 근본들을 비춰 보아야 한다. 그 방법은 낮아지는 것이다. 특권을 포기하고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주교단에게 한 연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 안에 방향과 방법이 모두 들어 있다.

 

 
 

박문수(프란치스코)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이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