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현철,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 21,4-9; 요한 3,13-17

2013년, 프란치스코 교종의 등장 이후, 세간의 조명을 가장 많이 받은 성인은 아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일 것이다. 현 교종은 교회 역사상 최초로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했다. 교종은 지난 6월에 발표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프란치스코 성인을 자신의 ‘길잡이요 영감으로’ 삼았다고 분명히 밝혔다.(10항) 교종은 성인을 ‘하느님과 이웃과 자연과 자기 자신과 멋진 조화를 이루며 소박하게 사셨던’ 신비가요 순례자로 평가하였다.(10항)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회칙의 핵심 개념인 “통합생태론” 구현의 모범이었다는 뜻이다.

즉위 첫해 성 프란치스코 축일 미사에서 교종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와 모든 피조물과 이루었던 친교를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교종은 성인의 평화와 친교는 모두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 만남에서 온 회심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십자가로 촉발된 프란치스코의 회심은 내적으로는 자기비움의 태도로 이어졌고, 외적으로는 실제의 가난으로 나타났다. 성인의 가난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생을 마친 나자렛 예수를 보다 철저히 따르려는 결단이자 삶의 양식이었다. 그의 가난은 “피상적인 금욕주의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곧 현실을 단순히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11항)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평화, 모든 피조물에 대한 형제애가 움텄다.

평화는 정의에서 나온다. 평화는 정의의 작품이고 열매다. 정의, 곧 세상의 의로움은 하느님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창조질서에 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고,(이사 32,17)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선언이다.(사목헌장 78항) 프란치스코 교종도 자신의 회칙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평화, 정의, 창조보전은 절대적으로 서로 연결된 세 가지 주제입니다.”(92항)

예수의 십자가는 창조질서 회복을 위한 노력의 결과였고, 그 대가였다. 예수가 편들었던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은 누구였던가? 인간의 존엄과 평등에서 원천적으로 배제되어 죄인 취급을 받았던 하느님의 피조물, 하느님의 모상들이 아니었던가? 예수가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했던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이들 또한 모든 인간에 부여된 창조질서인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루카 4,18-19) 예수는 이를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뜻으로, 자신의 사명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선포했다. 그리고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그 대가는 십자가, 십자가 위의 죽음이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를 기리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하느님이 이 세상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일어난 사건, 육화라는 자기 비움의 사건이었다. 육화로 우리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뜻을 끝까지 밀고 갔을 때의 사건, 십자가라는 자기 비움의 사건이었다. 육화와 십자가는 창조질서의 회복과 완성을 위한 자기 비움의 상징이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그 길로 부르고 있다. 바로 거기에 영원한 생명, 우리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창조질서를 훼손하고 파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자본’이다. 자본의 횡포와 그로 인한 폐해가 사회와 자연에서 가히 전 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노동현장을 보라. 정리해고 요건 완화와 비정규직 확대를 노동개혁으로 강변, 강행하려고 하고 있다. 지난 정권이 망쳐 놓은 우리의 강들을 보라. 현 정권이 파헤치려고 작정한 우리의 산들을 보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늘날 가장 심각하고 치명적이고 영구적인 폐해는 핵발전에서 일어나고 있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보라. 하지만 핵발전으로 인한 파괴적 결과의 진면목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욱 무섭고 기괴하다. 이런 핵발전소를 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안정적인 전력수급, 값싼 전기, 풍요와 편리 등을 내걸고 확장에 확장을 거듭해 왔다. 공기업이라는 한전과 한수원은 핵발전이 안전하고 경제적이고 깨끗하고 필요하다는 거짓말로 일관해 왔다. 이들의 행태를 보면,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월호 사건의 처리 방식과 과정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 5월 25일 영덕읍내에서 경북 영덕군 영해 본당 주임 손성문 신부와, 서명 운동을 위해 제천에서 온 수녀들이 영덕 핵발전소 찬반 주민투표 서명을 받고 있다. ⓒ박혜령

탈핵! 오늘 우리 시대의 창조질서 회복을 위해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운동이고, 의미 있는 운동이다. 정의를 세우는 일이다.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하지만 탈핵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탈핵의 과정이 지난할 것을 우리는 각오해야 한다. 핵기술이 생겨난 지 칠십 년이 넘었다. 그 자체의 동력이 생겨난 지 이미 오래다. 정부와 산업계와 학계가 이권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다. 핵기술로 엄청난 이득을 챙기는 집단의 고리는 광범위하고, 그 세력은 강고하다. 거대한 자본의 힘이 어김없이 거기에도 똬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핵기술이 편리와 풍요를 가져다 줄 것이라며 사람들을 미혹시킨다. 탐스럽고 먹음직스럽게 포장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기간 이 말에 현혹되고 중독되었다. ‘원자력 신화’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핵기술은 선악과임이 틀림없다. 핵발전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탐욕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노예로 살던 이집트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해방의 광야로 나온 뒤에, 시간이 지나자 조바심을 내고 상당수는 예전의 노예 상태를 그리워하기까지 한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 21,5)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은 험하다. 해방과 자유, 생명으로 가는 발걸음을 막는 유혹은 그렇게 강력하다. 하지만 핵발전이 우리를 유혹하는 삶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해방과 자유의 삶이 아니다. 그것은 예속과 노예의 삶에 불과하다. 생명이 아니라 결국 죽음으로 빠져드는 길이다.

탈핵으로 해방과 자유, 생명과 평화의 삶을 원하는 우리들은 오늘 이곳 영덕 성당에서 ‘탈핵천주교연대’의 출범에 함께 뜻을 모으고 있다. 탈핵천주교연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시민으로서, 우리는 탈핵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 단체들과 연대하여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급한 일에 함께 투신해야 한다. 당장은 여기 영덕이 바로 그 현장이다. 지난 9월 9일, ‘영덕핵발전소 찬반주민투표 추진위원회’는 11월 11일을 주민투표일로 발표했다. 상황이 급박하다. 영덕에 우리 모두 힘껏 연대하여 힘을 보태야 한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탈핵의 여정에서 우리가 고유하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꼭 필요하지만 다른 이들이, 단체들이 챙기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핵발전의 윤리적 차원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 핵발전으로 인한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피해자들과 함께 하며 고통을 나누는 것/ 탈핵에 헌신하는 사람들이 길고 험한 여정에서 지치지 않도록, 새로운 힘의 원천을 제공하는 것, 우리가 바로 그 원천이 되는 것/ 탈핵운동이 각자의 일상에서 자본의 굴레를 단호히 끊는, 그래서 삶의 근원적 변화로 이어지도록 돕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가 고유하게 할 수 있는 일,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내적 변화가 요청된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강조하신 “생태적 회심”이다.(217항) 근본적인 차원에서, 세상과 사람들의 변화를 이루어 내려면 우리부터 우리 자신의 내면의 상태와 태도를 점검하고 추슬러야 한다.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이 지적했듯이, 내적인 광야와 외적인 광야의 크기는 서로 비례한다.(217항) 1960년대 초반 토머스 머튼과 베트남의 승려 틱녓하인(틱낫한)이 처음 만나 나누었다는 대화가 생각난다. 머튼의 질문이다. “절에 들어간 첫해에 배운 것은 무엇이었나?” 머튼은 승려의 수도생활을 굉장히 궁금해 했었나보다. 틱녓하인의 대답이다. “문을 조용히 열고 닫는 것!” 너무나 개인적이고 평범한 일 같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문을 고요히 닫는 사람의 행동과 마음에는 이미 타자, 다른 이들과 자연에 대한 태도가 들어있다. 개인의 내적 상태, 타인들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결정한다. 우리 개인의 내면이 중요한 까닭이다.

▲ 조현철 신부, 박성율 목사, 박그림 녹색연합 대표 등은 8월 10일 오색케이블카 경로인 오색탐방로에서 대청봉까지 오체투지를 진행했다.(사진 제공 = 녹색연합)

지난 8월 10일,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을 막기 위해 박그림 녹색연합 공동대표와 함께 오체투지로 오색에서 대청봉까지 올랐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설악산에서 수십 년을 지내 온 박그림 대표의 강인한 체력이 아니었다. 그분은 오체투지로 나아가다, 케이블카 사업이 확정되면 잘려 나갈 운명을 뜻하는 ‘끈’이 감긴 나무를 보면 잠시 멈추고 온몸으로 그 나무를 껴안았다. 나무를 껴안고 위로하고 함께 아파했다. 엎드렸을 때, 길바닥의 꽃이 눈에 들어오면 한동안 그 꽃의 향을 맡았다. 내가 정작 놀랐던 것은 말없는 자연을 느끼는, 자연과 교감하는 그분의 감수성이었다.

진정한 생태적 회심은 개인의 삶, 생활양식의 변화로 이어진다. 적을수록 더 많은 것이라는 확신은 검약과 단순과 절제의 생활양식을 선택하도록 한다.(222항) 물질주의와 소비주의 사회에서 소유와 소비를 거부하는 삶은 그 자체가 “예언적이고 관상적인 생활 방식”이다.(222항)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한 가난으로 모든 피조물과 평화와 친교를 이룬 프란치스코 성인이 오늘날도 여전히, 아니 ‘더욱’ 중요한 까닭이다.

물론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 내려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개인의 회심, 결단과 선택이 합해져 사회에서 가시적 흐름을 형성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당면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사회적 사랑, 정치적 사랑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사회 문제들은 단순히 개인의 선행의 총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협력망을 통하여 해결해야 합니다.” “지속적인 변화를 이루는 데에 필요한 생태적 회개는 공동체의 회개이기도 합니다.”(219항) 하지만 사회적 사랑, 정치적 사랑은 “서로를 돌보는 작은 몸짓으로 넘치는 사랑”,(231항) 개인의 생태적 회심에서 출발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개인의 회심 없이, 공동체의 회심은 없다.

오늘 출범하는 ‘탈핵천주교연대’가 우리들의 생태적 회심을, 그리고 그 회심에서 우러나오는 “관대한 돌봄의 정신”(220항)을 사회적 사랑, 정치적 사랑으로 변화, 결집시키는 장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탈핵천주교연대’, 함께 모은 뜻을 함께 걸으며 이루나가는 아름다운 여정이었으면 한다. 이 여정의 첫 열매가 영덕 신규핵발전소 백지화이길 간절히 빈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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