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믿을 수 없는 교회

1993년 루이스 페레스 아기레(1941-2001)라는 우루과이 출신 예수회 사제는 "믿을 수 없는 교회“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오늘날의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회됨, 다시 말하면 하느님 나라의 전조로서 기능과 의무를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만의 세계를 이루었다는 데에 있다고 말한다. 그 결과로 교회는 더이상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없는 "믿을 수 없는 교회"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은 옳았다. 그리고 그의 비판이 비록 라틴아메리카라고 하는 특정한 지역의 상황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한국 교회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 상황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개신교 혹은 가톨릭을 막론하고) 위기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위기는 양적성장이 둔화되었다는 것만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진정한 위기는 교회가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것에서 오고 있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의 획기적인 행보로 교회를 향한 사람들의 신뢰가 약간은 회복되는 기미가 보이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교회는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해방신학과 교회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잃어버린 신뢰 회복,  다시 말하면 믿을 수 없는 교회의 모습에서 믿을 수 있는 교회로 회복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해방신학의 교회론을 간단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해방신학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해방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인가?

해방신학을 향한 많은 오해 중의 하나가 해방신학을 하면 교회 사역을 망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을 하는 사역자가 오면 그 교회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고 정치적 집단으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오해 때문에 많은 교회에서 배척을 당한 경험이 있다. 과연 그러한가? 해방신학의 교회론은 과연 교회를 망하게 하는가? 해방신학은 교회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오늘 나는 여기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말하는 교회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1. 구원과 역사 해방의 성사로서의 교회

구원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세계로 향하는 전 단계로 이해돼서는 안 된다. 교회는 구원을 역사적 해방의 관점에서 이해하는데 존재의 의미가 있다.  구원과 역사의 뒤바뀜을 향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역사적 행위다.(구스타보 구티에레스) 그리고 교회는 그러한 구원 행위의 성찬례적 장소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며 출발점이 된다.(1979, 푸에블라 주교회의)

역사적 해방의 성사로서의 교회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의 행위가 주님을 닮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순교적 믿음과 행위를 내포하고 있다. 역사적 해방의 길에 서 있는 교회는 순교적일 수밖에 없으며 박해를 받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구조를 강화시키고 권력을 확산시키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봉헌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적 해방의 길로 인도하는 교회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한 교회다.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는 이렇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우리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과 그들의 권리 회복과 보호를 교회 사목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삼았기 때문에 박해 받는 교회가 된 것을 기뻐합니다.(1979년 7월 15일 강론) 오늘날 교회가 신뢰를 잃게 된 것은 교회가 박해받는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역사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힘 있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구원과 역사적 해방의 성찬례로서의 교회를 외치는 해방신학이 교회를 위하지 않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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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초 공동체와 민중 공동체로서의 교회

해방신학은 무엇보다도 기초 공동체, 다시 말하자면 민중이 기반 되는 교회를 주장한다. 교회의 기초단위는 민중의 공동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에서 신앙교육, 사도적 전승의 개혁, 전례 그리고 복음 전파에서 민중적, 공동체적 차원은 기본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민중적이어야 한다.

민중차원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많은 해방신학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문화적 공동체"에서 "민중지혜적 공동체"로 이해하게 만들었다.(후안 카를로스 스카노네, 루이스 게라) 지배적 문화 혹은 가진 자의 문화에서 출발해 이해되던 계급적 교회에서 민중 삶의 애환과 특히 억압받는 상황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지혜로부터 이해되는 교회는 민주적이며 민중적인 교회로의 새로운 전환이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성직자 중심의 계급적인 교회로 바뀌는 모습을 보면서 해방신학의 민중적 교회를 위한 시도는 다시 상기해 보아야 할 시도가 아니겠는가.

또 다른 한편으로 교회에 대한 민중지혜적 이해는 후안 루이스 세군도로 하여금 교회를 상징적 공동체, 다시 말하면 역사적 해방의 상징으로서 교회 이해를 이끌어 낸다.

그렇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을 향한 가난한 사람들의 지혜의 상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다양하게 해석돼서 혼 소브리노는 '가난한 사람의 교회',  레오나르두 보프와 엘라쿠리아 등은 공동체의 네트워크로서의 교회를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민중적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민중 문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존중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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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대와 소통을 향한 길 위의 교회

해방신학의 교회론에서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연대와 소통이다.

경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고 있으며 더욱이 무관심의 세계화는 인류의 미래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의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하여 경고하기도 하였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의 삶의 현장에서 하는 성찰로 시작되었다. 그렇기에 그 시작부터 연대와 소통의 통로로 교회를 이해해 왔다.

교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대였다.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의 외침을 듣고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가난과 억압의 쇠사슬을 끊고자 하셨다. 예수의 성육신은 이러한 하느님과 인간의 연대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소통을 의미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 소통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해방을 향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또 다시 연대와 소통을 통해 역사적 해방으로 향하는 길 위의 공동체로 이해된다. 해방신학을 향한 오해 중의 하나는 해방신학이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신학의 전개에서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대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해방신학은 길 위의 신학이다. 늘 자신의 신학 자체를 포함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끝없는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롭게 하고 있다 해방의 과정은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길 위의 영성은 해방신학의 중요한 영성 중의 하나다. 교회는 길 위의 공동체다. 해방의 과정 위에 서 있는 길 위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이해는 교회로 하여금 늘 자신을 새롭게 개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위기는 이 같은 연대와 소통, 길 위의 영성을 잃어버렸기에 오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의 교회론은 위기의 한국교회를 향하여 귀중한 개혁의 원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과연 해방신학이 교회를 외면하는 신학인가? 아니다. 해방신학은 지금도 진정한 교회의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 길 위에 서 있는 신학이다.

다음 글에서는 해방신학의 교회론이 전통적인 교회론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위기 상황에서 어떤 새로운 대안과 공헌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쓰려고 한다. "해방신학은 교회를 위한 신학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해방신학의 교회론이 오늘 우리에게 대안적, 미래적이며 희망적인 신학적 성찰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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