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신학 나들이]

 

악의 평범성

▲ 한나 아렌트 (1906~1975).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전체주의의 기원> 등의 저서를 통해 폭력에 대해 성찰했다.
한나 아렌트는 1960년 나치정권의 제2인자 아이히만의 재판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오른팔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유대인 학살 임무를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식으로” 수행했던 사람으로, 1960년 예루살렘에서 전범재판을 받았다.

사람들은 당시 법정에 선 아이히만에게서 잔혹한 야수와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에게서 발견한 모습은 그런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이요, 충실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월급을 받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의 모습에 아렌트는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법정의 재판과 교도소 수형과정이라는 환경에서도 나치체제 당시와 마찬가지로 활동하였다. 그는 매우 모범적인 수형자였다. 그러나 그는 틀에 박힌 진행과정이 없는 상황에 직면하면 무기력해졌다. 그는 늘 틀에 박힌 상투적인 언어로 말했고, 그 상투적인 언어와 틀에 박힌 인습적 행동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찌해야 바를 모르는 순진하고 천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결코 악마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적 확신이나 악의적 신념을 가진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과거의 그의 끔찍한 행적과 전범으로서 재판을 받는 그의 모습이 도대체 연결이 되지 않아 오히려 끔찍할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그런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죄악을 저지를 수 있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문제는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도무지 생각하지 않는 ‘무사유’ 곧 ‘생각하지 않음’이라고 결론짓는다. ‘어리석음’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음’은 평범하게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깃들 수 있는 악이라고 보았다. 아렌트는 그러한 악을 ‘평범한 악’, 그리고 그러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악의 평범성’이라고 집약하였다.

병사들은 그저 관습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했다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을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로마의 병사들이 해골 언덕에 올라 다른 죄수 두 명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갖고 예수님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며 조롱했다. 유대인의 왕이거든 자신이나 구원해보라고 조롱한다. 루가복음은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은 한마디 말을 덧붙여 전한다. 자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병사들을 두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병사들은 멀쩡한 정신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잔혹한 십자가 처형방식에도 일정한 절차가 있었다. 복음서들에는 그와 같은 십자가형의 절차가 어긋나지 않게 묘사되어 있다. 병사들은 그 절차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고 난 후 행하는 관습마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태연스럽게 제비뽑기를 해 예수의 옷을 나눴다. 모든 절차와 마무리 방식까지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지금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그 병사들이 십자가형의 절차를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 절차 안에서 자신들이 행해야 할 바에 충실하고 있지만, 그 십자가형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행위가 아니라 한 사람을 완전히 능멸하고 그가 가진 마지막 실오라기 하나마저도 완전히 강탈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더 근본적으로는 그렇게 사람을 완전히 능멸하고 완전히 강탈해온 악한 세상의 권력이 지금 하늘의 진리를 말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세상의 권력, 곧 로마제국의 권력이 정한 규범과 절차를 따라 죄인을 처형한다는 사실을 알 뿐, 그것이 곧 진실을 압살하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실을 압살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저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뿐, 그것이 군인의 명예로운 본분이라고 받아들일 뿐,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엄청난 범죄의 행위, 죄악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생각하지 않음, 악에 빠지는 이유

바로 그 로마 병사들은 아이히만이 빠진 ‘평범한 악’을 행하는 상황에 빠져 있다. 로마 병사들의 행위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다. 그들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렇게 악에 빠지는 이유는 바로 ‘생각하지 않음’ 때문이다. 자신들이 수행하는 일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에 그들은 거대한 죄악에 동참하는 주인공들이 되고 만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사건과 그 사건 안에서 자신들의 행위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는 병사들 앞에서 그 행위의 희생자인 예수는 끝까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십자가에 달려 있는 사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의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생각이 있어야 고통을 감당하고 이겨낼 수 있다.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생각한다. ‘너희가 내 몸을 이렇게 짓밟지만 진리 그 자체를 죽이지는 못한다. 지금 진리를 압살하는 그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진리의 위대함을 증언한다. 죽이지 않으면 두려워 살 수 없기에 죽이려고 하는 것 아니냐?’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때린 사람은 편히 자지 못하지만, 맞은 사람은 편히 잔다는 말이다. 맞아놓고도 편히 잘 수 있는 것은 고통을 받고도 즐거워하는 변태적 성격 때문이 아니다. 타인에게 완력을 가하는 악행을 스스로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때린 사람이 잘 자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타인에게 완력을 가해 괴롭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모두 ‘생각’ 있는 경우다.

그러나 생각이 없는 경우는 원초적일 수밖에 없다. 때렸으니 통쾌하고 맞았으니 분하다. 이렇게 되면 악순환이 계속된다. 기어코 복수를 해야 분이 풀린다. 그러나 그 복수는 또 다른 악행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생각 없는 삶의 실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 생각 없는 삶의 악순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이다. 알지 못하고 행하는 이들을 용서해달라는 기원은 그 악순환의 마침표다. 민중신학은 이를 일러 ‘단’(斷)이라 했다.

죽어가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 예수

십자가 사건의 현장에는, ‘살아 있으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 병사들과, ‘죽어가면서도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 예수가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전환은 생각하기를 멈춘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가능성, 새로운 전환은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자명한 인습과 틀에 매여 거기에 충실한다. 그러기에 그 자명한 인습과 틀을 옭아매는 악을 내버려둔다. 자신이 악에 연루된 사실조차 모른다. 그러나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은 그 자명한 인습과 틀을 부정한다. 어떤 길이 그 상황을 반전시킬 것인가를 생각하고 실제로 그 반전을 가능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렇게 일어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어째서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에 이른다고 강조했을까? 율법은 정해진 규칙이다. 그것은 생각이 없어도 따를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선택과 결단을 해야만 한다. 내가 믿어야 하는 일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일찍이 함석헌 선생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항상 의식하고 그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일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있는 현상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항상 이의를 제기하고 새로운 것을 꿈꾼다. 거기서 새로운 돌파구가 나오고,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가 가능해진다. 반면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현상을 자명한 것으로 본다.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용인한다. 여기에서 새로운 가능성은 차단되고 ‘자명한’ 독단이 지배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가 막힌다. 각자에게만 자명할 뿐인 명제, 각자에게만 ‘진리’일 뿐인 도그마들이 부딪힌다. 어째서 세상이, 교회가, 현실이, 자신이 잘 바뀌지 않을까?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자명한 인습과 상투적인 말에 의존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매 순간 지금 내가 처한 현실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 생각이 있어야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지는 ‘평범한 악’에서 나 스스로가 해방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하느님마저 자신을 버렸다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그렇게 버려져 육신이 만신창이가 되고 끝내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도 결코 죽지 않았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사순절 막바지 고난주간을 맞으며 우리가 생각해야 할 일이다.

최형묵/ 천안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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