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9]

 

인간이 그대로 하늘이니

여러 종교들의 가르침은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진리는 원천적으로 이미 이루어져 있으니, 마음의 눈을 열고 이미 이루어져 있는 진리를 보아야 한다고 선포한다. 가령 <열반경>에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있는 것에는 모두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거나 “산천초목이 다 불성을 이루고 있다”(山川草木悉皆成佛)고도 한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모든 것은 불성의 작용이자 원천적으로 불성 자체이니 그만큼 귀하다는 것이다.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최제우 사상의 핵심은 “시천주”(侍天主)이다. 인간은 누구나 천주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손병희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식으로 표현했다. 인간이 그대로 하늘이니 누가 누구를 억압하고 누가 누구에게 억압당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뜻이 들어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을 하늘처럼 섬겨야”(事人如天)한다는 이것이 동학 최고의 윤리가 된다.

성서에서는 “생겨난 것 치고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없다”(요한 1,3)고 말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으로 생겨난, 하느님의 귀한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한결같이 진리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며, 인간은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진리을 온전히 볼 수 있어야 할 뿐이라는 요청이 들어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진, 성서의 ‘아버지와 두 아들 이야기’(루가 15,11-32)도 그런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다. 잘 알려진 구절이지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내가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되돌아보게 만든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어느날 둘째 아들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해보려는 욕심에 아버지께 요구했다: ‘아버지, 제 몫 좀 챙겨 주십시오. 저도 제 식대로 한 번 살아 볼랍니다.’ 아버지는 두 말 없이 둘째 몫의 재산을 챙겨주었다. 둘째는 가능한 한 아버지의 손길이 닿지 않을만한 먼 곳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제 멋대로 살며 흥청망청 지냈다. 그러다 갖고 있던 돈은 바닥났고, 심한 흉년마저 겹치자 굶주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까맣게 잊고 살았던 아버지의 집이 생각났고 그리워졌다.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자기가 있던 그 자리는 양식이 풍성하고 기쁨이 넘치는 집이었음을, 아들과 아버지는 도대체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그래서 다시 돌아가야 할 자리임을 둘째는 떠나보고야 비로소 떠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떠난 아들을 늘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 있던 아버지는 멀리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달려나가 초라해진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기쁘게 입을 맞추었다. 아들의 잘못에 대해 일언반구 따지지 않았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너무 기뻐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기에 여념이 없는 분이었다. 아들이 돈을 달랄 때는 내주는 분이었고, 뉘우치고 돌아오니 더 기쁜 분이었다. 그렇게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분이었다.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오늘뿐인 분이었다.

온전하고 한결같은 오늘, 하느님

유영모 선생은 ‘오늘’이라는 말을 “온 + 늘”로 푼다. ‘온’은 온전하다는 뜻이고, ‘늘’은 한결같다는 뜻이다. 언제나 온전하고 한결같음이 바로 ‘오늘’이라는 말이다. 오늘은 영원하다. 하느님이 ‘영원한 오늘’과 같은 분인 것이다. 왔으면 그만이지 하며, 그것으로 족해하고 기뻐하는 분이다. 물론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도 늘 함께 하시는 분이셨다. 이것이 둘째 아들의 아버지였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본 큰 아들은 동생을 꾸짖기는커녕 기쁨의 잔치를 베풀어주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다. 아버지와 늘 함께 했는데도 자신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잡아주지 않던 아버지가 방탕하게 살다온 동생에게는 소를 잡아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는 모습을 보고는 도대체 말이 되느냐며 따졌다. 그런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애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31) 아버지께서는 애당초 이미 모든 것을 자신에게 내주고 계셨던 분이었음을 늘 함께 살았던 큰아들도 몰랐다. 한집에 살고 있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했지만, 아버지와 그저 같은 공간에 있었을 뿐, 큰아들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사실 잘 알지 못했다. 자기가 아버지의 이름을 더 많이 불렀으니 아버지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 마땅하다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아버지는 그러한 판단 안에 갇히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 이런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의 것이 본래 큰아들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러기에 큰아들 역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누리고 살던 자신의 귀한 아들이었음을 되새겨준다. 

둘째에게든 첫째에게든 아버지는 늘 함께 하시고 늘 내어주는 분이셨다. 늘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첫째가 아버지에 가깝고 집나간 둘째는 아버지와 멀다고 생각할 법 하겠으나, 사실상 아버지는 그 누구와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 모두를 위한 분이셨다. 그리스도교인과도 비그리스도교인과도, 유신론자와도 무신론자와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함께 하고 내어주는 분이셨다. 그것이 예수의 아버지셨다. 

0도와 360도의 차이

 비로소 돌아온 자리, 그곳은 아버지의 집이다. 아버지의 집은 저 하늘 꼭대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있는 자리, 전에 있던 자리가 모두 아버지의 집이다. 둘째는 떠나기 전이나 떠난 이후나 돌아온 뒤나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떠나기 이전의 삶과 돌아온 이후의 삶이 결코 같은 삶만은 아니다.

전에도 아버지 곁에 있었지만 그 때의 아버지는 나의 존재감을 제한하는 거추장스러운 타인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이후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자기 존재의 근원이었다. 과거의 자리가 0도의 자리였다면, 돌아온 후의 자리는 360도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0도와 360도는 수학적으로는 같은 지점이지만, 종교적인 차원에서는 결코 같지 않다.

0도의 자리는 불평과 불만, 시기와 질투의 자리, 더 많이 소유하라고 충동하는 자리이지만, 360도의 자리는 내 것이 네 것이라며 다 내어주고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자리이다. 0도의 자리가 내 멋대로 살아보고픈 욕망의 자리라면, 360의 자리는 떠난다고 할 때 미련없이 내어주고, 그러면서 다시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자리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면, 과거를 불문하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리이다.

0도의 자리가 그리스도교회 중심적 자리라면, 360도의 자리는 교회 안이든 밖이든 어디서든 베풀어지는 은총의 자리이다. 특정 조직이나 제도나 건물이 아니라, 모든 곳이 하느님의 교회임을 볼 줄 아는 자리이다. 하느님은 어떤 자리든 떠나 본 적이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계시고 이미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계신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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