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속죄에 대한 이야기

안다. 그도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사랑이든 아니든 그 사람이 좋다. 하지만 그게 다다. 뭘 할 수 있겠는가. 안다고 한들 모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차라리 끝내 모른 척 하지 못한 서로가 서로에게 죄인이고 무뢰한이다.

세상은 무자비하다. 애초에 예의란 없다. 예의 같은 걸 챙기며 살 만큼 여유로워 본 적도, 사랑 받아 본 적도, 믿어 본 적도 없다. ‘사람 둘만 모이면 배신 한다.’라는 불신이 신조인 박준길(박성웅 분)은 살인 후 쫓기는 신세가 되고, 그런 그를 배신하지 않는 애인 김혜경(전도연 분)에게 돈을 구해 도망 다닌다. 애인을 제 맘대로 ‘선금 땡겨’ 업소에 팔고, 함께 상해로 가자며 돈을 구해 오라고도 한다. 관객은 얼핏 혜경이 이해되지 않는다. 이 사랑은 그녀의 삶을 더 떨어질 데 없는 나락까지 몰고 갔다. 준길을 만난 후 진창을 기며 사는 그녀다.

“이 바닥 생활 십 년 만에 빚이 5억이고 희망이 없는 년”이 된 왕년엔 최고의 텐프로 출신인 그녀는 사나움만 남았다. 아끼던 진주 귀걸이와 함께 마지막 자존심까지 팔아치운 그녀다.

곁을 스쳐간 사내들은 참 오래도 그녀 주변을 맴돈다. 그렇다고 그들이 그녀 인생에 하등 도움 될 것은 없다. 남자라면 쓴맛 단맛 다 본 그녀는 실상 남자를 제압할 줄도 알고 구워삶을 줄도 안다. 다만 준길에 대해서만은 바보 맹추처럼 군다. 왜 그렇게까지 그에게 희망을 걸었을까.

▲ <무뢰한>, 오승욱 감독, 2015.

정재곤(김남길 분)은 집도 없이 잠복근무지 앞에 차를 대고 먹고 자고 하는 형사다. 적당히 부패했고 대단히 무례하다. 형사라는 직업을 유지하는 것도 세상에서 제일 줄 닿을 데 많고 힘을 과시할 수 있어서인 듯 보인다. 줄다리기만 잘 하면 범인도 검거하고 ‘스폰’도 적당히 받을 수 있는 직업 같기도 하다. 뒷조사와 비상수단 동원에 능하고, 방법에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꽤 유능하다. 검거 욕심이 지나쳐 다 파괴하고도 자기가 뭘 했는지 모른다. “난 내 일을 했을 뿐이지, 널 배신한 게 아냐.”라는 말은 그의 오랜 변명인지도 모른다.

형사 재곤은 신분을 ‘이영준’으로 위장하고 혜경이 일하는 술집에 취직한다. 명분은 준길을 잡기 위해서다. 밤에만 움직이는 어떤 경제활동의 영역, 그곳에 그들은 몸을 굽혀 서식한다.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상태로 하루하루 넘어간다. 그는 그녀에게 점점 빠져든다. 서로 이용당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내 약점이 한두 개라야 말이지... 내 약점은 혜경 씨잖아요.” 이윽고 그 새벽, 형사는 살인범의 여자에게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라는 어마어마한 말을 던지고 만다. 그녀가 판 것을 되사온 진주 귀걸이도 베개에 올려둔다. “나랑 같이 (상해에) 갈 거지?”라고 묻는 준길과는 차원이 다르다. 내일이 없는 그 뒷골목에서 차마 해서는 안 될 금기어다. 그래서, 그 말은 훗날 부메랑으로 심장에 되돌아와 박힐 칼날이 된다. 감히 ‘평범한 일상’을 꿈꾸게 했으므로, 단 하루라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게 만들었으므로, 그건 죄였다.

혜경에게 그 말은, 깊이가 다른 상흔으로 남는다. “더러운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아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살의 상처다. 그가 영준이어도 재곤이어도 답이 없는 관계다. 그리고 죽이고 싶도록 밉고 사무치게 그립다.

오승욱 감독은 이 영화가 “나름의 속죄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속죄라면, 자기의 행동이 타인에게 끼친 영향력을 뒤늦게나마 깨달았을 때 인간이 용서를 구하는 방식일까? 혜경의 마지막 반격은 영준을 향한 것일까, 재곤을 향한 것일까? 가상의 존재일 때만 진심을 살짝 내비칠 수 있었던 그에 대한 뒤엉킨 응어리. 그를 찌르고 바들바들 떨면서야 비로소 감지된 듯한 뭉클한 애증이다.

“새해에는 돈 좀 많이 받아라. XX년아.” 20만원도 못 받는 밑바닥으로 추락한 지 오래인 혜경에게, 그녀를 도저히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는 무력한 그가 비틀거리며 내뱉는 피 묻은 혼잣말. 그 지독한 덕담에도 출구는 없다.

이름도 빚도 현실감도 없는 세계에서만 농담처럼 가능했던 “같이 살까?”는 갈 데 없는 메아리다. 약점이 한둘이 아닌데다 몸에 기억하기도 싫은 무수한 상처들을 새긴 채 살아야 하는, 누구를 좋아하는 일이 서로 벼랑 끝으로 미는 일에 불과한 무뢰한들의 세상. 이 축축하고 매캐한 뒷골목의 새벽 풍경 말고, 어떤 다른 세상을 꿈꿔 볼 수는 있는 것일까.

산상수훈 말씀이 떠오른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그러나 이 영화는 단언한다. 때로는 아무 위로도 없는 마무리가 더 솔직하다는 것을. 위로조차도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는 시체에 덮어주는 홑이불에 불과한 것이니, 쓰라린 것은 쓰라린 대로 그냥 두겠다.


김원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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