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8월 30일(연중 제22주일) 마르 7,1-8.14-15 신명 4,1-2.6-8

오늘 우리가 제1 독서로 들은 구약성경 신명기는 율법의 기원에 대해 말하였습니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기 위해 필요한 지침이었습니다. 모세는 설명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 있느냐?’(신명 4,7) 율법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신 사실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그분이 자기 안에서도 살아 일하시게 하기 위해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합니다. 율법은 바로 그 깨달음과 그 실천이 발생하게 하는 지침이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각종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잘 지키면 무사하지만, 잘못 지키면 화를 입기도 합니다. 도로교통법을 예로 들면, 우리가 그것을 잘 지키면, 우리 모두가 도로를 자유롭게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는 교통사고를 내거나, 범칙금을 물어야 합니다. 도로교통법은 우리 모두가 도로의 혜택을 누리도록 도와줍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하느님이 함께 계신 사실을 환기시키고, 그분과 함께 사는 혜택을 누리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자유의 혜택을 누리도록 합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유롭게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은 600년 가까운 세월을 강대국의 식민지로 살았고, 예수님 시대에는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오랜 식민지 생활을 겪은 이스라엘이 식민 지배를 벗어나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그들의 숙원이었습니다. 그 민족적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 당시 유대교 실세들이 제시한 것은 율법을 충실히 지켜, 하느님의 도움을 얻어, 독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과 율사’는 그런 주장을 하는 유대교의 실세들입니다. 이들이 오늘 시비의 주제로 삼은 것은 ‘조상의 전통’이라는 그 시대의 위생법입니다.
 
팔레스티나는 서쪽에 지중해를 두고, 북쪽과 남쪽과 동쪽에 사막이 둘러싸고 있습니다. 비는 1월과 2월 사이 한 달 동안만 오고, 평소에는 매우 건조합니다. 바람이 불면 주변 사막의 모래가 날려 옵니다. 우리나라가 한 해에 몇 번 겪는 황사 현상이 그곳에서는 1, 2월을 제외하고 1년 내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이 귀한 지방이라 사람들은 물을 아낍니다. 그런 지역 여건을 생각하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조상의 전통’이라는 위생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음식 먹기 전에는 손을 씻고,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씻으라는 법입니다. 잔이나 단지나 놋그릇 등 음식물을 담는 용기들도 자주 씻으라는 법입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율법의 존재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주었습니다.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게 한 강박관념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조상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마르 7,8) 오늘 제1 독서가 말하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것은 자기들의 삶 안에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인간의 삶 안에 주님으로 살아 계시게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실세들은 율법을 국권 회복이라는 인간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으로 삼아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율법을 문자대로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강요하였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고, 그것을 하느님이 주신 축복이라 생각하는 경우는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던 오해와 같은 것입니다. 입학시험에 자녀가 성공하면, 또 사업이 잘되면, 혹은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 하느님이 특별히 축복하셨다고 생각하는 오해들입니다. 모든 일이 하느님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몇 사람을 예뻐해서 그들의 염원을 이루어 주고, 다른 사람들은 실패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뻐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제국을 망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축구 선수를 하느님은 예뻐하시고, 상대 팀을 패배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 빌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자기 한 사람 잘되겠다는 것은 인류가 있으면서부터 가진 욕심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중요한 일 앞에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고, 가물면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심청은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특권을 얻었습니다. 

▲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내는 모습.(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느님에게 기도하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받은 것을 은혜롭게 생각하지 말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 한 사람의 뜻이 이루어진 것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생각하고, 말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했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 하느님에게 빌면, 나에게 특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 이기심의 소행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루카 17,21)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 그 은혜로움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독일 나치 수용소에서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로 1945년에 처형당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본회퍼라는 개신교 목사입니다. 그분이 옥중에서 남긴 시가 있습니다. 그는 그 시에서 우리가 하는 일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비통할 때 하느님을 찾습니다.
그분께 빵과 기쁨을 달라고, 도움을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병에서, 죄에서, 죽음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이도 믿지 않는 이도 모두가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모두가 실천하는 우리의 전통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는 계속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비통할 때 하느님을 찾습니다.
가난하고 천하고, 쉴 곳도 먹을 것도 없는 하느님을 봅니다.
죄와 연약함과 죽음에 버려진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이 고통당하시는 동안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곁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행한 이웃, 버려진 이웃 안에 계시면서 비통해 하시는 하느님을 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이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시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하느님은 비통함에 잠긴 모든 사람을 찾아오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빵으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먹이십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또 믿지 않는 이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비통함에 잠긴 모든 이,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모든 이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통해서 그들을 위해 하시는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