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민주화-근본적 정체성 회복의 길 4.

오늘 우리 사회는 언론의 홍수 속에서 흘러가고 있다. 언론공해·매스컴공해·홍보매체공해란 문제가 등장할 정도로 언론이 범람하면서 부정적인 역기능과, 때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의견들이 분출되고 있다. 혹자는 방종적인 언론의 자유로 인한 사회의 위기와 파국을 우려하기도 한다.

언론의 기능은 사회의 사실과 진실을 알리면서 개선점을 찾는데 있다. 진실을 위장하고 은폐시키려는 저변에는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주지하다시피 독재유지의 첫 번째 기본조건은 언론통제이며 언론장악이다. 언론통제 없이는 군사정권, 독재정권이 유지될 수 없다.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언론자유의 목적은 국민들에게 진실과 사실을 알리면서 공론화하고 또는 의식화하여 보다 건전하고 정직한 사회, 특히 공동선의 가치를 추구하는데 있다. 또한 정치지도자, 사회지도자들에게 정도의 길을 가도록 깨우쳐 주고, 과오를 고발하여 책임을 안고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도록 하는 감시 기능도 수반하고 있다. 즉 언론은 사실의 보도뿐만 아니라 비판과 감시의 기능이 있다.

그럼, 교회 내에 보도와 감시의 기능을 갖춘 참된 의미의 민주사회에서 통용되는 언론이 있는가? 인간으로 구성된 교회 내에도 비리·부조리·불의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 그 유혹은 더 클 수 있다. 지도자들의 과오를 덮어주고 감싸주면서 이해와 관용을 호소하는 식의 교회언론 보도는 가끔 보게 되는데, 교회자체의 불의, 과오나 비리를 고발하거나 공개적으로 보도한 경우는 아주 드물다. 오히려 교회 밖의 사회언론이 교회의 문제점을 보도하고 감추어진 비리와 부조리를, 특히 비상식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 언론은 교회 내부 문제, 즉 교의에 관계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지만, 사회문제화 된 것으로 일반 사람들과 직결되는 큰 이슈는 놓치지 않는다. 이미 지난 잡지 기사지만, 의미가 있어 인용한다:

“여성의 낙태문제를 놓고 교황청과 갈등을 빚어 온 독일 가톨릭교회가 낙태확인서 발급을 중단함으로써 3년 동안의 분열의 종지부를 찍게 됐다. 독일교회는 바티칸 재정의 20%를 지원하며 가톨릭국가 안에서 독자적 영향력을 확보해 왔다. 1996년 헬무트 콜 총리의 요청에 따라 교회 안에 276개의 낙태 상담소를 설치하고 여성들에게 확인서를 발부하여 왔다. 가톨릭 봉사단체인 까리따스 보고에 의하면 1997년 교회 상담소를 찾은 12만 명 여성 중에 2만 명이 낙태문제를 상담했고, 이중 25%가 교회 허락 하에 낙태를 했다. 여성사제직과 사제결혼 문제에 대해 독일교회와 교황청과 이견을 지니고 있다.”(한겨레21 1999년 7월 8일자.)

이런 기사를 본 한국의 평신도, 성직자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감히 상상 할 수도 없는 낙태문제를 독일교회가 3년간이나 교황청과 대립하면서 낙태확인서를 발부했다는 사실도 놀라운 사건이지만, 이런 사실을 놓고 독일교회의 언론이 소상히 취급했던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이렇게 교황청과 대립하는 사건을 놓고 과연 한국교회의 언론은 이러한 사건을 보도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리라 본다. 한국교회는 사실보도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언론은 교황청의 교서, 담화문, 주교단의 사목교서나 권고사항에 대하여 한국의 문화, 정서, 의식과는 전연 개의치 않고 비판기사도 없이 “항상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고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교도권의 사목적인 가르침에 대하여 무조건 순종해야 하고, 이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이미 굳어진 듯하다.

새 주교(교구장, 보좌주교)가 교황청에서 임명되었다-어떤 과정을 통해 선정됐는지는 비밀이지만-는 발표를 하면 교회 언론매체는 온갖 미사여구로 새 주교를 칭찬하고 있다. “학문과 성덕이 뛰어나다”, “현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 “사목경험이 풍부한 지도자” 마치 결점은 없고 완전한 모형의 지도자로 긍정적인 평가만 하고 있다. 교황님의 선택이니 “틀림없는 선택”이라고 까지 한다. 이것은 고위성직자는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된 성역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긍정적인 평가에 순종하고 침묵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근거 없는, 때로는 사실인 것에 대한 의혹과 의심들이 저변에 흐르면서 더 많은 그릇된 의견들을 빚어내기도 한다. 이런 경우 언론이 건전한 비판의 역할을 한다면 부정적인 의견을 정화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미국에 거주할 때 “성직자들의 비행기사”가 자주 언론에 등장하곤 했다. 이 문제를 같이 살던 미국인 신부에게 ‘이런 기사들이 신자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성직자들의 과오와 평신도들의 신앙심은 별개의 것이다. 오히려 보도하지 않고 감추거나 위장시키면 더욱 나쁜 결과가 나온다. 오히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성직자를 이해하고 용서한다. 미국언론은 헌법에 보장된 것으로 진실을 알리는 언론은 누구의 제재나 간섭을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교회의 공식 언론매체의 기능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우려하고 있다. 문제점이 있다면 이를 공론화 하면서 진솔한 견해와 주장들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개선점과 해결책이 나온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의견-때로는 일방의 불만일지라도-을 표출시키지 못하는 언론은 기득권층의 보호막일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사회에는 개인이든 사회 집단이든 각기 그 환경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정보의 권리가 내재한다. 그러나 이 권리의 올바른 행사는 커뮤니케이션이 그 내용에서 언제나 진실하여야 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며 완전하여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사회매체에 관한 교령「놀라운 기술」5항) 사회매체는 공동선을 지향함으로 국가의 권위 역시, “현대의 사회발전에 반드시 필요한 진실하고 공정한 정보의 자유 특히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고 옹호”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 교도권의 가르침은 일반 사회언론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언론도 포함된다. 교회언론이 호교론적이고 제도교회의 체제유지적인 차원에서만 기능한다면, 기득권 보호에 득이 될지는 몰라도 현 시대의 의식과 정서를 외면하게 되어 오히려 복음선포에 비효율적이고 퇴보적이 될 수 있다.

사실 현재 한국교회의 기관지인 평화신문·방송, 가톨릭신문과 여타의 교회의 잡지들은 공지사항이나 행사, 교서와 교도권의 지시를 보도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성직자들의 근황에 큰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이런 가정을 해 본다. “교구장의 임기는 10년?”, “교구 시노드 무용론”, “한국 사제들의 지적능력 저하”, “한국교회는 가장 수구적이고 로마교황청의 가장 충실하고 모범적인 지점”. 이런 기사 제목이 나온다면 교회 위상에 해독이 될까? 오히려 ‘쇄신’, ‘개혁’을 부르짖는 교회의 진솔한 반성의 소산이 아닐까?

만일 호교론적 관점에 서있는 교회언론이 사회언론처럼 무방비상태로 개방된다면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불신만을 초래하기 때문에 일정정도의 통제가 불가피하다는 의견에 대해서, 필자는 언론의 횡포나 역기능에 대한 한국신자들이나 국민들의 분별력이 그 부정적 시각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현대사회는 모든 정보가 개방되어 있는 세상이다. 감추어진 사실은 모두 드러나는 상황이다. 감추면 감출수록 의혹과 불신이 조장된다.

교회는 “인간은 오직 자유로서만 선을 지향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자유를 높이 평가하고 추구한다.”(사목헌장「기쁨과희망」17항) 고 가르친다. 책임감 있는 자유로운 언론은 진실을 추구한다. 허위, 위선, 체면을 중시하던 시대는 지났다. 현재는 정보의 시대로 모든 것이 노출되게 되어 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이들에 대하여 감시기능을 하는 언론은 보다 나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이것 또한 민주주의 기본조건이다. 교회언론도 마찬가지로 민주사회 안에 현주소를 공유하고 있다. 언론의 본래 기능은 진실과 사실을 추구하고 보도하는데 있다. 교회언론도 그 나름대로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본질적 언론의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안승길 2008.01.18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