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의 번역자 이연학 신부 인터뷰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인천교구에서 중학생 명도회가 레지오 마리애였다. 매 주일 회합을 준비하면서 실천 활동에서 보고할 묵주기도의 단수를 높이기 위해 애를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묵주기도를 성모님께 바치는 장미꽃다발이라는 뜻으로 ‘로사리오’라고도 부르지만, 묵주신공이란 말도 썼다. 실제로 무공을 쌓듯이, 묵주기도를 할 적엔 성모송을 입에서 날아가듯이 빠른 속도로 읊조렸다. 그래야 짧은 시간에 빠르게 단수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합 시간이면 단원들이 늘 읽어야 하는 노래가 있었다. 마니피캇이다. 루카복음 1,46-55까지 이어지는 마니피캇은 ‘성모찬가’인데, 사실상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는 생각 없이 이 말들을 읊조렸지만, 지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새기고 있는지 궁금하다. 하느님은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에게 시선을 두고 계신다는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메시지가 가능한 것은 메시아 예수님이 ‘마리아’의 몸을 빌었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수락이 하느님을 낮은 곳에서 가장 크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마니피캇의 첫 소절인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에서 ‘찬송하다’의 라틴말 번역이 바로 ‘마니피캇’인데, 이 말은 ‘크게 하다’란 뜻이다. 이 첫 소절을 통해 예수님의 어머니 된 마리아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살핀 책이 피에로 코다의 <마니피캇>(벽난로, 2015)다. 이 책을 번역한 이연학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 이연학 신부는 하느님은 사랑 때문에 인간의 자궁에 들어갈 만큼 작아지셨다고 말했다. ⓒ한상봉

이연학 신부는 올리베따노 베네딕도 수도회 소속으로 지난 2월부터 한국 이외의 아시아 나라 가운데 한 곳을 선정해 공동체를 설립하라는 소임을 총아빠스에게 직접 지시받고 준비 중에 있다.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교부신학을 전공한 이연학 신부는 스승인 피에로 코다 신부가 피렌체에 있는 소피아대학 총장으로 가면서 유학시절의 마지막 기간을 거기서 보냈다.

“귀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읽고 있었던 책이 이 책입니다. 스승에게 보은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는데, 성모님에 대한 아주 놀라운 사실을 배웠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안에 새로운 생명이 들어오시게 해 드림으로써 주님을 ‘크시게’ 해 드렸다는 것이지요. 마리아의 하느님은 막연한 분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입니다. 그분은 강한 손과 펼친 팔로 당신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분입니다. 그분의 아드님이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계시는’ 하느님 자신입니다. 그분은 하느님 현존의 가장 빼어난 표지라고 봐야죠. 이분을 우리 가운데 현존케 하려고 마리아는 ‘어머니’가 되셨던 것이죠. 이 책은 그 사건을 다루고 있어요.”

피에로 코다는 하느님을 “해방하시는 분, 용서하고 사랑하고 질투하시는 분, 아가에 나오는 낭군”이라고 표현한다. 그분은 고요하고 적막한 밤을 틈타 연인을 찾아와 새날 빛이 퍼질 때가지 머물다 가는 분이며, 한 마디로 “다정하고 힘센 분”이다. 마리아는 귀로 들어서만 알던 이런 하느님을 제 자궁 속에 잉태함으로써 “하느님을 통째로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의 마리아 심정을 피에로 신부는 이렇게 대변했다.

“정녕 주님은 아가雅歌의 그 신랑이실까? 그분이 정말 내게까지 내려오신 것일까? 당신의 평화와 빛으로, 그 부드럽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내 마음에 오신 것일까? 아니, 그분이 정말 내 살을 꿰뚫고 들어와, 오직 당신만이 원천이 되시는 그 생명을 내 안에 탄생시키신 것이란 말인가?”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함으로써,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당신 사랑의 크심을 궁극에 이르기까지 드러내 보이도록 허락했다. 이연학 신부는 더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태胎 속에 담길 수 있을 정도로 작아지셨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했다고 피에로 신부는 말하고 있어요. 하느님은 당신 사랑의 크심을 드러내기 위해 당신이 먼저 작아지신 거죠. 그래서 그분이 생각하시는 구원이 이제 마리아의 응답에 맡겨졌다는 겁니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피조물의 보살핌에 의지하셨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작아지고 낮아질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하느님께서 그 일을 해내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왔다. 그렇게 그분은 가장 작아지심으로서 가장 크신 분이 되셨다. 나자렛의 가난한 처녀 마리아는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동의를 통해 ‘하느님을 낳으신 분’이 되셨다. 피에로 신부는 “사랑은 타자他者와 정녕 통通하기 위해 자신을 남김없이 그리고 고스란히 그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이런 사랑에 있다는 것이다.

▲ <마니피캇>, 피에로 코다 지음, 이연학 옮김, 벽난로, 2015.
이연학 신부는 “내가 나의 ‘바깥’으로 쏙 빠져나오면 내 안에 빈자리가 생기고, 이 빈자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대’[타자]가 들어온다.”면서 “내 안의 빈자리에 들어와 있는 그대의 얼굴이야말로 나의 진짜 얼굴임을 보는 것”이 삼위일체 신학에서 말하는 ‘상호내주相互內住’라고 했다. 이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관계 맺는 방식이라 했다. 서로의 마음 깊은 곳이 비워지면서 또한 채워지는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바깥’에 있는 타자[인간]로 당신 아드님을 태어나게 하면서, 타자들이 당신이 본성에 참여할 길을 열어주신 분이다. 마찬가지로 이연학 신부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버림받은 예수’에 대한 끼아라 루빅의 생각을 덧붙였다.

“끼아라 루빅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받으신 순간, 예수님은 당신의 신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느님을 선사하신다고 하셨어요. 무언가 주기 위해서 먼저 잃어버려야 한다는 거죠. 나를 내려놓고, 내가 없어야 나를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피에로 코다 신부가 ‘하느님은, 없기 때문에 있다’고 하신 거죠.”

아주 어려운 말이다. 끼아라 루빅과 피에르 신부의 이런 생각은 옛 그리스 교부들이 한결같이 확신했던 ‘신화神化’에 대한 이야기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여의시고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지옥벌을 면하고 천당에 들어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이 되는 데까지 이른다. “성모님이 인류를 대표해서, 그리고 제일 먼저 그 역할을 맡으셨다.”는 피에로 신부의 생각을 이연학 신부는 과달루페와 파티마, 루르드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을 사례로 들었다. 마리아는 다른 피조계의 여는 인간과 확연히 구분되는데, “마리아는 하느님과 본질을 공유하진 않지만, 신성의 세계로 이미 진입한, 거의 신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마리아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게 피에로 신부의 생각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이 오롯이 아버지를 향해 돌아서 있기 때문에 “나를 보는 이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도 이제 당신처럼 하라고 요구한다.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하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일을 먼저 행한 사람은 마리아였다. 피에로 신부는 단테의 말을 빌어 “하느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아들이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이제 ‘자기 아들의 딸’이 된다.”고 전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부재不在 가운데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정녕, 마리아 역시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 그리고 예수님이 요한을 가리키며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할 때, 마리아는 자기 아들을 잃어버려야 했다. 스스로 ‘하느님(예수)의 어머니’라는 특권을 내려놓음으로써, “수많은 형제들과 자매들의 어머니”가 된다.
이처럼 제자들도 자기를 비우는 과정을 통해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된다. 이 길로 우리를 밀어 붙이는 분이 성령이다. “이제 마리아는, 모든 제자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탄생되시도록 성령께 협력해 드려야 한다.” 결국 하느님은 자신을 비워 예수라는 타자로 머물고, 마리아는 예수를 낳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심을 버리고, 제자들의 어머니가 된다. 이 사건은 거꾸로 모든 그리스도인이 마리아처럼 예수를 잉태하고 출산함으로써 하느님께 이르러야 한다는 역설을 드러낸다. 그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의 해방을 위해 온유한 팔을 펼치시는 분이다. 그분처럼 우리도 작아지고 가난을 살아야 한다. 
 
한상봉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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