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발장 은행장 홍세화 선생 인터뷰

죄질이 나쁘거나 위험해서가 아니라 오직 벌금을 낼 형편이 못돼서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을 위한 형법개정안이 ‘장발장법’이다. 이 법안은 빅토르 위고의 장편소설 <레미제라블>에서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한 장발장에 대한 사회적 배려를 법제화 하자는 것이다. 죄질이 무거운 징역과 금고형에는 집행유예를 인정하면서 비교적 경미한 형벌인 벌금형에는 집행유예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문제 삼는 것이다. ‘현대판 장발장’은 2009년 기준 4만 명 정도 되는데, 대부분 소년소녀가장이나 미성년자, 수급권자 등 경제적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다. 이들은 100만 원 정도의 벌금도 낼 형편이 되지 않아서 징역을 살고 있다. 국화에서 법 개정이 이루어지기만 기다릴 수 없어서 상환기간도 없이 무이자로 벌금을 대신 빌려주는 은행이 ‘장발장은행’이다. <뜻밖의 소식>에서 장발장은행장인 홍세화 선생을 학습공동체 협동조합 가장자리 사무실에서 만났다.

▲ 홍세화 선생은 세상을 개탄할 시간에 겸손하게 이웃을 설득하라고 주문했다. ⓒ한상봉


장발장은행 : 가난한 이들, 징벌에서 사회적 배려의 대상으로

장발장은행은 인권연대의 오창익 사무국장과 서해성 작가가 제안한 것이다. 홍세화 선생은 나중에 이름만 얹게 된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분들이 2007~8년 즈음에 교도소 찾아가는 평화인문학을 하면서, 강좌를 들으러 오신 분들의 사연을 듣고 이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오는 분들이 1년에 4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2009년에는 43,199명이어서 형법을 바꾸어 달라고 국회에 청원하는 ‘43,199캠페인’을 벌였죠. 그렇지만 국회만 넋 놓고 바라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시작한 게 장발장은행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느낌이 오고, 많은 분들이 이 뜻에 동의를 해 주셨어요.”

장발장은행을 이해하려면 먼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를 떠올리면 된다.

“<레미제라블>을 읽으면, 장발장이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서 세상으로 나왔지만 여전히 문전박대만 당합니다. 그러다가 은퇴한 미리엘 주교에게서 환대를 받으며 하룻밤을 묵고 가게 됩니다. 이튿날 새벽에 장발장이 은수저 갖고 튀었는데, 경찰에 붙잡혀 온 장발장에게 미리엘 주교가 이렇게 말하죠. ‘내가 은촛대까지 주었는데 거건 왜 안 가져갔냐?’고요. 이때 주교가 한 말이 있어요. ‘당신의 영혼을 사겠다.’는 거죠. 장발장은 주교에게서 처음으로 ‘따뜻한 인정’을 느꼈던 거죠. 이런 경험이 장발장이 ‘사람’으로 살게 한 거죠. 장발장은행이 의미가 있다면 이런 겁니다. 이런 분들은 국가에서 그동안 징벌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는 무관심과 냉대의 대상으로 삼았죠. 장발장은행은 그 사람들에게 사회가 한번 따뜻함으로 다가가 보자는 시도입니다. 그분 중에 다만 한 두 분이라도 삶의 파문 같은 걸 일으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정도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장발장은행은 2015년 6월 기준으로 1,146명의 개인과 기관, 단체에서 3억5천만 원의 후원을 받아서 155명에게 2억8천만 원을 대출해 주었고, 그동안 모두 31명이 834만원을 상환했다고 한다. 한편 현행법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은 판결 확정일에서 30일 이내에 벌금을 납입해야 하는데, 장발장법은 벌금 납입기간 연장과 분할 납입 제도를 활성화시키자는 것이다. 그리고 끝내 벌금을 낼 수 없는 사람에게는 벌금 대신에 사회봉사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유럽처럼 소득에 따라서 벌금을 차등부과하는 일수벌금제도 도입을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제안들은 법무부와 일부 법조계의 반발 때문에 지체되고 있는 상황이다.

가톨릭교회에서도 염수정 추기경 등이 장발장은행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상황에서,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지 홍세화 선생에게 물어보았다. 홍 선생은 대체로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꺼낸 이야기가 아베 피에르 신부의 생각이었다. 아베 피에르는 세계적인 빈민구호단체인 엠마우스 창립자이며, 2003 여론조사기관 IFOP가 선정한 프랑스인이 가장 사랑하는 인물 1위에 오른 분이다.

“아베 피에르의 말씀 가운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있는데, 세상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나누어지는 게 아니고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웃사랑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으로 나뉘는데, 공적 영역은 정치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19세기까지 그리스도교의 역할은 온정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머물렀지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공적 영역으로 확장된 셈입니다. 당장에 너무 힘든 분들이 많이 있으니까 ‘자선’이라는 사적 영역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좀 더 공적인 영역에 관심을 기울여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어요.”

▲ <생각의 좌표>, 홍세화, 한겨레출판, 2009.
홍세화 선생은 19세기 초반 미국에서 부르주아 신자 부인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면서 보여주었던 오만함을 비판했다. <주홍글씨>를 쓴 나다니엘 호손은 “온정과 오만은 쌍둥이”라고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선심과 나눔 배경에 베푸는 자의 오만함이 배어있다는 아픈 지적이다. 그래서 홍세화 선생은 정치 영역에서 가난문제를 다루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여긴다. 받는 자의 자존감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을 쓴 빅토르 위고도 “나눔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왜 늘 주는 쪽 입장에서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받는 쪽 입장에서 나눔에 대한 생각을 더듬어야 한다.”고 말했다.

“19세기가 사적 나눔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공적 분배의 시대”라는 게 홍세화 선생의 생각이다. “조중동에서도 나눔 캠페인은 열심히 하면서, 분배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는데, 사실 ‘나눔과 분배’는 같은 뜻이잖아요. 이상한 일이죠.” 나눔의 반대는 독차지이고, 분배의 반대는 성장이라서 그런 것 같다. 경제성장보다 인간존엄성을 우선하는 흐름으로 가야한다고 홍세화 선생은 말했다.


토크빌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결국 이야기가 한국사회 문제로 넓어졌다. 했다. 홍세화 선생은 우리 사회가 아예 ‘이승만 시대’로 되돌아갔다고 꼬집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였던 유승민 의원이 말한 것처럼 “지금까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일제 부역세력이나 전쟁 분단세력들이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치르는 거죠. 민주주의든 공공성이든 말입니다. ‘공화국’이란 국가가 공공성을 지켜내야 하는데, 현재 지배세력은 의료, 교육, 복지 등 공공영역을 모두 사익추구를 위한 사적 영역으로 바꾸고 있어요. 공기업의 민영화가 대표적이죠. 이것은 지배세력이 국가의 이름으로 국가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홍세화 선생은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국가는 오른손과 왼손이 있다.”는 말을 인용했다. 오른손은 관료·경찰·군대·정보기관을 통해 국민을 관리 통제하는 기능이고, 왼손은 공공성의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가의 왼손을 잘라내고 국가의 오른손을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정원과 경찰을 강화하고 복지와 의료 등 공공부문을 약화시킨다는 지적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바닥을 쳤다고 생각했는데,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밑에 바닥이 더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차라리 대통령이 없으면 나을 텐데...” 그러나 이 절망적인 정치상황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국민은 없다.

알레시 드 토크빌은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했다. 결국 정부의 수준이 국민의 수준이란 말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선거에서 어떤 대통령을 뽑느냐가 아니라, 국민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불만을 표출하고 현실을 개탄하는 일은 쉽습니다. 그러나 남을 설득하는 일은 어렵지요. 자기 가족조차 설득하기 힘든데 어떻게 남을 설득할 수 있을까, 하고 아예 설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남을 설득하려면 먼저 나도 설득당할 수 있다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합니다. 보통 진보적 정치의식과 비판의식을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도 자기 자신을 설득대상으로 삼지 않아요. 나는 언제나 옳다는 거죠. 그렇지만 사실상 비판의식이란 게 선배 잘 만나서 생긴 것이고, 그런 책 몇 권 읽은 게 전부인데도 지적 우월감을 가고 있어요. 게다가 이런 분들이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 하면서 고생을 많이 하니까, 윤리적 우월감까지 있어서 대화할 줄도 몰라요. 겸손하지 않으면 아무도 설득할 수 없어요. 독선적인 태도가 문제라는 거죠.”

홍세화 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계의 회복’을 강조했다. 사람은 “어차피 의식의 주체가 각각이기 때문에 고립된 섬처럼 살아가고 있다.”면서,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든 뭐든 모여서 관계를 회복해야 희망이 있다고 전했다. 가족관계마저 무너진 상태에서는 소유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홍세화 선생이 ‘가장자리’라는 학습 협동조합을 만든 이유도 공부하면서 ‘지식’도 얻지만 새로운 관계를 시도해 보자는 취지였다.


한상봉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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