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한상봉]

‘참회의 정신’을 가장 강조해 온 가톨릭교회에서 한국교회처럼 회개하지 않는 교회도 드물다. 나치에 대한 독일의 철저한 응징과 반성에 비추어 침략전쟁에 대한 일본의 후안무치를 비난하지만 한국만큼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나라도, 교회도 드물다. 2010년 8월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이케나가 준 대주교는 ‘평화주간’ 담화문에서 한일합병 100년을 맞이해 일제의 식민정책과 일본교회의 역할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했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두 번 다시 같은 비극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하는 맹세인 동시에 미래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용기를 갖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는 일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바라시는 참된 인간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교회는 2000년 12월 3일자로 발표한 "한국 천주교회의 2000년 쇄신과 화해"에서도 일제강점 아래 한국교회의 친일행적에 대해 제대로 참회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때로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이런 박약한 역사의식을 지닌 한국교회가 참회하지 않는 까닭에 엉뚱한 스캔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유신독재정권과 유착해 온갖 이권을 따내고 교세를 불려온 대구대교구 역시 아직 한 번도 ‘자신들의 파시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하필이면 광복절 다음날인 2015년 8월 16일 꽃동네에서는 한국교회 친일파의 대표격인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을 딴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센터’가 건립되었다.

노기남 대주교와 ‘신생아와 어린이들을 위한 시설’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 이 아이들에게 노기남 대주교처럼 살라는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대구대교구처럼 역대 군사정권과 유착해 덩치를 키워온 꽃동네. 이 재단 대표인 오웅진 신부는 그동안 노 대주교의 ‘생명존중 정신’을 이어받아 낙태반대 운동, 생명살리기 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이런 점에서 아이들을 위한 시설 이름에 노기남 대주교의 이름을 넣었다고 설명했다. 노기남 대주교와 생명존중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사실상 꽃동네의 가장 강력한 후견인 노릇을 톡톡히 해 왔던 정진석 추기경의 설명은 더 기가 막히다. 그는 강론에서 자신이 노기남 대주교의 복사를 하면서 경험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노 대주교가 어린이들을 특히 사랑했다”고 말했다. 사실상 어린 시절에 겪은 손톱만한 인연이지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정진석 추기경의 특별한 친밀감의 표시로, 자신이 지원하던 꽃동네 시설 이름에 노기남 대주교 이름을 갖다 붙였다고 보는 게 맞다. 여기에 역사의식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전쟁을 독려한 대주교, 생명존중은 어디에?

오웅진 신부는 노기남 대주교의 생명존중사상을 칭송했지만, 노기남 대주교가 경성교구장이 되기 전후에 행한 일은 대부분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뿐이다. 병기를 헌납하고 전쟁을 부추기던 입술로 ‘생명존중’을 말할 수 있는 주교가 어디 있을까. 강제징용과 군 위안부 동원체제를 묵인하고 지원한 주교를 향해 “당신은 아이들을 각별히 사랑했다”고 입에 올리는 추기경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닌가 반성해야 한다.

“비록 (대일본)제국의 불패 태세가 확립되었을지라도 이로 만족하여 방심하지 말고 오로지 성전 목적 달성에 정신과 힘을 통째로 바칠 것이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당국에서 지도하는 바에 무언 복종할 것이요, 복종할지라도 마지못하여 하거나 겉으로 하는 체만 하거나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여 나갈지니, 특히 이 점에 있어서 모든 교우들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노기남 대주교는 1942년 1월 천주교 경성(서울)교구장에 임명되자마자 일제에 대한 충성을 맹약하듯이, 기관지인 <경향잡지>(1941년 2월호)를 통해 매월 첫째 주일을 애국주일로 지키고, 애국주일에는 일본군의 승리를 비는 무운장구(武運長久) 기원 미사성제를 지내며, 미사 전후에 애국식을 거행하는 한편, 미사 중 시국강론을 하고, 미사 뒤에는 단체로 신궁, 신사에 참배하도록 지시했다. 노기남 대주교가 이사장을 맡았던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은 1942년 7월 ‘국민총력-사변 5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성명을 발표해, 신자들이 성심껏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당부했다. 여기서 ‘사변’이란 일본이 1937년에 시작한 중일전쟁을 말한다.

같은 해 4월 노기남 대주교는 논산지원병훈련소를 방문해 황군에 나선 이들을 격려했다. 이 당시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은 이사회에서 무기헌납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이를 위해 매월 1인 1전 헌금을 하게 했다. 앞서 3월에는 <경향잡지>를 통해 ‘대동아전쟁 기구(祈求)’라는 기도문을 게재했는데, 이 기도문을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끝에 바치도록 각 본당에 명령했다. 그러니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할 때 천주교인 가운데 가장 먼저 지목한 사람이 노기남 대주교였다는 사실은 당연한 일이다.

▲ 노기남 대주교.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 사전"에 올라 있는 사진.(사진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천주교 일각에서는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 행적이 “교회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 마지막 장면의 친일파 염석진처럼 “해방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말하는 게 더 정직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윤경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장은 “사전에 수록된 4389명은 역사적, 실증적 검증을 거쳐 친일행적이 명백한 사람들”이며, “나라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외세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우리 자신을 성찰해 볼 수 있는 성숙한 내부고백이 필요하다. 일제치하에서 출세, 부귀영화를 누렸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심판은 준엄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아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참으로 한국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당시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종교단체에도 밀어붙여 한국교회 교구장을 일본인으로 교체시키고 있었는데, 광주교구는 와키다 신부가, 대구교구는 하야사카 신부가 교구장이 되었다. 그런데 노기남 대주교가 프랑스인인 원 라리보 주교 대신에 경성교구장이 될 때 일제가 문제 삼지 않은 이유가 있다. 노기남 대주교는 교구장이 되기 전부터 뚜렷한 친일 행로를 걷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카모토 가네하루(岡本鐵治). 노기남 대주교가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평안도 출신의 오카모토(노기남) 신부는 1930년 사제서품을 받고 곧바로 종현성당(현 명동성당) 보좌신부에 임명되었고, 1937년 8월 15일 종현천주교청년회에서 주최한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에 참석해 고문신부로서 시국강연을 했다. 1939년 5월 친일 전쟁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할 때는 이사를 맡고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할 때도 이사장을 맡았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37년 7월 중일전쟁 개전 이후 1939년 말까지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관련 기원미사 2만 9622회, 시국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장병가족 위문 151회, 부상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른다.

‘건국절’ 논란을 둘러싼 이승만과 노기남 대주교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 센터’ 건립 기념 행사에 경대수 새누리당 의원, 김문수 새누리당 보수혁신특별위원장, 손병두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과 뉴라이트 보수단체를 대표하는 쟁쟁한 인사들이 이 행사에 참석한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이 노기남 대주교와 정치적 맥락이 닿아 있다는 생각은 쉽게 할 수 있다.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휼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언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즉 박정희 대통령의 후예인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건국 67주년’ 발언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항일 독립운동의 역사, 대한민국 헌법과 정통성을 훼손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된 민족국가’를 열망했던 김구를 연상시키는 대한민국임시정부보다는 남한의 단독정부를 희망했던 이승만에게서 대한민국의 전통성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일’이라고 부르며 ‘건국절’ 논란을 일으켰다. 노기남 대주교는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미군정과 결탁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서 호흡을 같이 한 사람들이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미군정과 유대를 다지기 위해 1945년 11월 1일 명동성당에서 아놀드 소장을 비롯한 수천 명의 미군이 참석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몰한 미군을 위한 추도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교회의 실력자였던 윤을수 신부는 독립협회에서 이승만과 같이 일한 경험이 있고, 미국의 영향권 안에서 교육받고 외교에 밝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구석이 많았다. 실제로 노기남 주교는 주교관에서 이승만 환영만찬회를 먼저 갖고, 나중에 상해임시정부를 환영하는 미사를 가졌다.

▲ 정부수립 후 1948년 한때, 이승만과 나란히 선 노기남 주교. (사진 출처: 한국교회사연구소 홈페이지)

단독정부 수립을 전제로 한 1948년 5.10 총선거에 몰입했던 한국 천주교회는 선거가 끝난 뒤 6월 20일에 ‘독립촉구를 기원하는 대례미사’를 봉헌했다. 여기서 ‘독립’이란 물론 ‘단정 수립’을 말한다. 이런 태도는 지금도 뉴라이트 세력들이 1945년 8월 15일이 아니라 1948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부르자고 주장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이 미사는 교황사절 방 파트리치오(패트릭 번) 주교와 노기남 대주교가 주례를 하였고, 당연히 이승만과 조병옥이 미사에 참례하여 답사를 하였다. 이 사건은 노기남 대주교와 이승만이 얼마나 밀착되어 있었는지 잘 보여준다. 실제로 이승만은 노기남 대주교와 연대한다는 의미에서 가톨릭교회의 얼굴로 총선에 나선 장면에게 당시 정치 1번지라고 부르던 ‘종로 을구’에서 출마할 수 있도록 양보했다. 물론 노기남 대주교는 총선거에서 당선된 장면 축하식을 마치고 다음날 이승만을 방문해 감사를 표시했다.

5.10 총선거 이후에 당선된 의원들이 모여서 5월 31일에 국회를 구성하고 이승만이 의장으로 선출되고, 1948년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들어섰을 때 교황 비오 12세는 즉각 축전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띄웠으며, 1949년 4월 중순에는 교황청이 한국을 승인하면서 교황사절인 방 주교가 교황대사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노기남 대주교가 서울교구장으로 있을 때, 한국교회는 교황사절 방 주교와 장면의 활약으로 남한 단독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었다.

“아직 광복절은 오지 않았다”
친일 이력에 대한 참회록 써야 할 한국교회

친일 논란에 얽혀 있는 노기남 대주교의 후예들과 박정희 대통령의 후예들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은 ‘반공’이다. 심지어 박정희는 군사쿠데타의 명분을 찾기 위해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았고, 이런 명분을 받아들여 당시 노기남 대주교가 수장으로 있던 한국교회는 장면 정부를 무너뜨린 군사정권을 승인했다. 이들이 공통으로 빨대를 꽂을 수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스스로 친일파는 아니었지만,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친일잔재 청산을 무력화시킨 인물이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을 만든 것이 이승만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그래서 친일파의 후예들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신들의 안위를 맡기려 한다. 그리고 이승만처럼 ‘반공’전선에 앞장선다는 명분으로 ‘애국의 화신’임을 자부한다. 그렇게 기득권은 일제강점기부터 2015년 대한민국의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후예들이 합작으로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며 꽃동네에서 노기남 대주교를 추모하는 것이다.

한편 김구를 생각하면 가슴이 여전히 시리고 아프다. 김구는 자신의 통일 의지가 현실화되지 못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1949년 6월 26일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회’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사망했다. '암살'이란 영화에서 독립군 제3지대 저격수 안옥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아직도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해.” 대한민국의 기득권적 보수인사들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이라고 우기고 있는 반헌법적 상황에서, 어쩌면 우리나라는 아직 ‘광복’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친일파들이 참회하고 기득권을 내려놓는 나라가 ‘해방된 나라’다. 아직 한 번도 제대로 참회록을 쓰지 않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탈 없는 한국 천주교회도 아직 ‘해방된 교회’가 아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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