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석 공익소송기금 지원 소송 승소

노동자가 업무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사망했을 때 입증 책임을 유족에게 지웠던 지난 사례와 달리 험한 작업 환경과 관리 수준 등을 고려한 판결이 나왔다

지난 12일 서울행정법원은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 업체에서 페인트, 시너를 수거, 폐기하는 작업을 하다가 사망한 김 아무개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 줬다.

▲ 2012년 종로 보신각에서 열린 4.28 세계 산재사망노동자 추모제 (사진 출처 = www.flickr.com/ 원출처 =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는 19일 이 판결이 “고인의 업무와 발병 및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입증 책임을 유족에게 과도하게 지웠던 다른 선례와 달리, 열악한 작업 환경과 한국의 유해물질 관리 수준을 종합적으로 고려했다”고 발표했다.

이 소송은 천주교인권위원회의 유현석 공익소송기금으로 진행됐다. 이 기금은 지난 2009년 인권변호사였던 유 변호사의 유족들이 고인의  뜻을 이어 인권 침해를 받고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공익소송 비용으로 내놓았다.

김 아무개씨는 1992년부터 현대중공업의 여러 사내하청 업체에서 선박 칠작업에 쓰는 벤젠 성분이 들어 있는 페인트, 시너 등을 폐기물 수집소로 운반해 남아 있는 페인트 등을 폐기용 드럼통에 부어 모으는 작업을 하던 중 2002년 10월 다발성 골수종 진단을 받았다. 그 뒤에도 같은 작업 환경에서 근무하다가 같은 병으로 인해 신장이 손상됐고, 2011년 10월 만성 신부전에 따른 심장마비로 죽었다.

천주교인권위는 “작업 중에 김 씨는 잔류물이 남지 않도록 맨손으로 페인트 등을 만지기도 했고, 폐기물 수집소는 반만 개방돼 가스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전문 보호 장구나 환기 시설은 없었다”고 밝혔다.

김 씨의 유족은 업무상 장기간 유해물질에 노출돼 병이 생기고 사망에 이르렀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으나 공단은 이를 거부했다. 유족은 2013년 8월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고, 이번에 승소한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공단은 2010년 하반기와 2011년 상반기에 사내하청 업체 5곳의 작업환경측정 결과를 제시하며 김 씨의 공정에서 기준치를 초과하는 유해물질이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우리나라는 2003년도까지는 산업현장에서 벤젠 농도의 규제를 10ppm 이하로 매우 느슨하게 규제했으므로 망인이 당시 근무했던 사업장에서도 현재의 기준치인 1ppm을 넘는 수준의 벤젠 농도가 유지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또 공단은 김 씨의 최초 진단 시점이 입사한 뒤 1년 6개월 정도라는 이유로 업무와 발병 관계를 부인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사망할 당시의 사업장뿐만 아니라 전의 사업장에서 수행한 업무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씨는 1992년부터 현대중공업의 사내하청 노동자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했으며, 이 사이 하청업체가 여러 번 바뀌었다.

40대 미만의 다발성 골수종 환자는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한데, 김 씨가 처음으로 병의 진단을 받았을 때는 38살이었다. 이에 재판부는 김 씨가 벤젠에 오랜 기간 노출된 것이 발병에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천주교인권위는 “이번 판결이 조선업계, 특히 현대중공업에 만연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죽음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위는 기업인권네트워크 등이 만든 ‘현대중공업 산재발생에 관한 의견서’를 인용하며 현대중공업에서는 2014년에 13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사망했으며, 이는 2000년 이후 가장 많은 수라고 밝혔다.

이어 인권위는 “현대중공업이 산재 사고가 줄었다는 이유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1000억 원 가까운 산재보험료를 할인받았다”며 “원청이 산재 발생 가능성이 높은 작업을 의도적으로 하청업체로 넘겨 자신의 산재 발생률은 줄이는 ‘위험의 외주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또한 “사내하청 노동자의 현장은 원청의 사업장이므로 영세한 하청업체에서는 작업 환경을 개선할 여지도 의지도 적을 수밖에 없다”며 “사내하청 노동자는 구조적으로 사망 사고 가능성이 높은 환경에 노출돼 있다”고 지적했다.

끝으로 인권위는 “산재 예방과 사고 후 책임의 법적 문제를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사내 하청 제도와 노동자의 건강권은 양립할 수 없다”며 “진짜 사장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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