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8월 23일(연중 제21주일) 요한 6,60-69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요한 복음서 6장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6장은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로 시작하여 성찬의 의미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며 명상합니다.

요한 복음서는 성찬, 곧 성체성사를 대단히 중요시합니다. 이 복음서는 2장에서 예수님이 성전 상인들을 쫓아내어 성전을 정화하신 이야기를 한 다음, 그리스도인의 성전은 성체라고 말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고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면서 이렇게 해설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몸이 곧 성전임을 가리켜 말씀하셨다.”(요한 2,21) 그러나 그 사실을 제자들이 깨달은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의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죽은 이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야 제자들은 이 말씀을 상기하고 성서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요한 2,22) 예수님이 부활하신 뒤 제자들이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몸인 성체가 그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요한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다른 복음서들은 이미 집필되어 있었고, 신앙공동체들은 성찬을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서 저자는 공동체들이 이미 실천하고 있는 성찬이 그냥 먹고 마시는 허례허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수난 전에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이별의 만찬을 하셨고, 그것이 성찬의 기원이라고만 기록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성찬의 기원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최후만찬에서 그 이야기를 빼 버렸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이 만찬의 식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들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주인이요 선생인 내가 발을 씻었다면 그대들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13,14) 성찬은 먹고 마시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과 같이 겸손하게 섬기는 종으로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요한 복음서를 집필한 사람은 태어나는 신앙공동체들의 한가운데에 성찬이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사실을 봅니다. 그는 성찬이 신앙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으로 다음과 같은 말도 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성찬은 육의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육은 자기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는,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자기 한 몸 잘 먹고, 편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의미합니다. 성찬은 그런 삶을 위해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영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지평의 삶을 지칭합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기 주변을 보는, 하느님 자녀의 삶을 의미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받들고, 그 생명을 이어서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 오늘과는 달리 생각할 때였습니다. 현대인은 부모의 생각을 따라 살기 보다는 각자 자기의 창의력을 좇아서 독자적으로 삽니다. 오늘과 같이 개인의 창의성과 독자성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시대는 인류역사에 없었습니다. 초기 신앙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이 하느님의 뜻을 받들고, 그 생명을 이어서 사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삶을 배워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말합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명 현상을 읽어내어 그것을 빛으로 삼아, 영의 삶을 살라고 권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요한 6,63)고 말하였습니다. 자기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육의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영의 삶이 하느님의 생명을 준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아끼고, 고치고, 살리는 분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생명이 있고, 생명을 위한 헌신과 사랑이 있으며, 살신성인하는 보살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영이 주는 생명입니다. 그런 헌신과 사랑과 보살핌을 실천하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자연은 많은 일을 합니다.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햇빛과 수분이 공급되고 땅이 보존한 양분이 흘러듭니다. 그래서 대지에는 식물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생명이 태어나고 자랍니다. 부모된 사람이 자기 자신만 소중히 생각하지 않고, 헌신하기에 자녀가 태어나고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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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흥부전’을 우리는 잘 압니다. 놀부는 육의 일만을 생각하는 인간의 표본입니다. 놀부는 많은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호박씨를 얻어 횡재하기 위해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흥부는 가난하지만, 형의 재물을 탐하지 않습니다. 그는 다리 부러진 제비 한 마리의 생명도 소중히 생각합니다. 물론 이 소설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말하려는 작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흥부가 축복 받게 함으로써, 재물만을 욕심내지 않고, 미미한 생명이라도 소중히 생각하고, 아끼며 돌보는 데에 하늘의 축복이 있다는 교훈을 줍니다.

영을 따라 사는 생명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주변에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육 혹은 우리의 욕심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서는 사람은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요한 3,3)고 말합니다. 영의 삶은 우리 생명에서 자연스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과의 교감을 필요로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교감을 가장 강도 높게 또한 확실하게 하신 분이었습니다.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기적적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빵은 본시 육을 위한 음식이지만, 성변화 뒤에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 안에 재생시켜서 영의 삶을 살게 합니다. 자기 자신만 보는 삶이 아니라 하느님을 생각하는 삶이 발생하게 합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하는 성사입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들은 기도, 성서 독서 및 성찬이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한다고 믿었습니다. 신앙인은 성찬에서 삶의 힘을 얻어 영의 삶, 곧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을 하며 삽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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