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영성가로 손꼽히는 여성, 라비아와 힐데가르트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의 창시자들은 모두 남자다. 예수(기독교), 붓다(불교), 무함마드(이슬람), 공자(유교) 등등. 이런 사례를 들어 일부 남성들은 남성이 여성보다 영적인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일부에서 많은 학자들은 대부분 고등종교의 창시자들이 남성으로 이루어진 것은 부계사회의 산물로 보고 있다. 채집을 중심으로 했던 원시공동체사회는 종족유지에 필수적인 출산의 주도권을 가지고 생산성이 보다 나은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계적 성격의 사회였다.

모든 씨족은 전체 친족의 공동 어머니인 한 여자를 시조로 삼고 자연스럽게 여신숭배가 생겨났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형성과 대규모 전쟁 등으로 남성의 역할이 커지면서 여성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결국 남성 우위의 가부장적 사회가 형성되었다. 신도 여신에서 남신으로 대체되었고 사제들 역시 남성들의 차지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남성신, 남성사제 중심의 전통과 교리는 거의 모든 종교에 이어져 내려왔고 오늘날 고등종교라고 주장하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불교 같은 세계종교들 역시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면서 성적 불평등을 제도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창시자 이상으로 뛰어난 영성과 지도력을 가진 여성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 중 가장 대표적 인물이 이슬람의 라비아 알 아다위야(~801)와 기독교의 빙엔 폰 힐데가르트(1098~1179), 아빌라의 성 테레사(1515년~1582)다.

이슬람의 여성 신비가 라비아

사진출처/한국이슬람중앙회 홈페이지
이슬람의 여성 신비가 라비아는 8세기 중반에 활약한 신비가로 원래는 노예였으나 그의 신앙에 탄복한 주인에 의해 풀려났다. 라비아는 당시 아랍세계에서는 거의 드물게 결혼하지 않고 신과 만나는 일에 몰두해 결국 깨달음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수피전통에서 처음으로 신의 순수한 사랑을 가르쳤고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신(알라)이시여, 이제 밤은 지나가고 동이 트고 있나이다. 저의 예배를 당신이 받아 주셨는지, 아니면 물리치셨는지, 제가 이를 얼마나 알고 싶은지 아시는지요. 저를 위로해 주실 수 있는 분은 당신밖에 없나이다. 제가 비오니, 저를 위로해 주소서. 당신은 저에게 생명을 주셨고, 저에게 먹을 것을 주셨으며, 저의 명성은 모두 당신의 것이나이다. 행여 당신이 저를 문전에서 내쫓으셔도 저는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 가슴속에 부둥켜안고 있는 당신에 대한 사랑 때문이나이다."

그의 이 같은 높은 영성과 덕성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의 생애동안 많은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전해오는 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양손에 횃불과 물동이를 들었던 일이다.

어느 날 그가 횃불과 물동이를 들고 거리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천당에는 불을 지르고 지옥에는 물을 부어 천국과 지옥이 똑같이 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지옥에 대한 공포나 천국에 대한 희망 때문이 아니라 오직 신에 대한 사랑으로 믿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랑하는 분을 향해 길을 가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지옥도 천국도 없다'는 절대적이고 조건 없는 사랑의 주제는 그를 통해 수피전통에 깊이 충만하게 스며들었고 이슬람 신비주의를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렸다. '성인들의 전기'를 남긴 저명한 수피 아타르는 그에게 더없이 극진한 찬양의 글을 남겼다.

"굳건한 베일로 얼굴을 가렸던 여인, 진실의 긴 옷으로 몸을 감쌌던 여인, 사랑의 불길로 그리움을 살랐던 여인, 임에게 다가가 깊은 사랑에 빠졌던 여인, 그 분과 하나 되어 그 속으로 사라진 여인, 남성들로부터도 고결함을 인정받은 여인, 순수무구한 제2의 마리아."

그는 이슬람의 무시무시한 가부장적 전통을 뛰어 넘은 위대한 신비가로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기도와 가르침을 모은 책을 읽었다. 라비아는 위대한 영성의 소유자에게는 성적 구분이 무의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용감한 도전으로 마리암, 리하나, 세이예다 나피사 등과 같은 이슬람 여성신비가들이 용감하게 그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힐데가르트, 예언자이면서 철학자, 신비가, 음악가 등으로 명성높아

힐데가르트 폰 빙엔는 예언자이자 혁신자였고 기적의 주인공이었으며 철학자, 신비가, 의학자, 음악가, 시인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그는 수녀였지만 가톨릭교회의 어두운 자화상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로서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외쳤던 인물이다.

모든 신비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다'는 내면의 울림에 따라 교황이나 추기경, 황제는 물론이고 일반 평민이나 수도원의 시종에 이르기 까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 어떤 사람과도 거침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높은 영성과 학식에도 불구하고 스콜라학자들과는 다르게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상적인 언어와 말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그는 또 인간과 함께 또 하나의 신의 창조물인 자연과 통합을 추구해 '생태신학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약초연구 등 전통 민간요법에도 관심을 두면서 인간의 몸을 동양의학의 핵심을 이루는 음양오행설과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하면서 환자들을 치료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재능은 라비아와 같은 신에 대한 절대적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미래를 예지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던 그는 42세 때 신비체험 하고 영적 지혜를 얻게 되었다. 그 때의 경험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늘로부터 매우 밝은 빛이 내 침상에 쏟아져 내렸는데, 그 빛은 마치 타들어가지는 않으면서 빛나기만 하는 불꽃같았다. 그 불꽃은 태양처럼 내 심장과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갑자기 나는 시편과 복음서, 구약과 신약의 여러 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음악 역시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힐데가르트는 40대 중반부터 시와 음악을 짓기 시작했는데 내용은 주로 성자들의 일생 가운데 주요한 사건들을 시적으로 담고 있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생각은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 힐데가르트가 그린 도판 중에서
"인간의 삶은 피조되고 구원된 자로서 소리가 나는 악기들이니, 하느님의 경이들은 우리의 자아에서 생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화음, 곧 악기를 연주할 때 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 소리는 현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연주자의 손길을 통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다정하신 하느님의 리라와 하프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의 선구자와 같은 존재임에도 말년에 파문당하는 등의 고초를 겪으면서 묻혀 있다가 근래 여성학자들의 연구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여성사학자 레지네 페르노드는 "그녀가 의도했던 신학의 방향성이 두 번째 천년의 첫머리로부터 제대로 펼쳐질 수 있었다면, 두 번째 천년의 끝자락에 있는 현재 기독교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아빌라의 테레사

아빌라의 테레사는 자신의 생애동안 이미 크게 명성을 떨친 인물로 사망후 곧 성인 지위에 올랐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려져 있어 특별한 언급이 필요없을 정도다. 그는 중세 말기 전반적 퇴폐현상이 나타난 수도원 개혁에 나서 엄격한 폐쇄생활을 지향하는 맨발의 수도회를 이끌어 나갔다.

테레사는 여성으로서의 선구적 자각을 지닌 지도자였다. 그는 신비체험과 기도를 통해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봉사에 헌신해 종교적 경건성이 사회적 참여와 조화를 이룬 신앙적 삶의 본을 보여주었다.

▲ 아빌라의 테레사

그는 생애동안 닥친 정치적 압박이나 삶의 고통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과제를 실현해나갔다. <자서전>, <주의 기도>, <완덕의 길>, <서간집>등의 저서를 남긴 그녀는 종교개혁의 혼돈 속에서 가톨릭 교권제도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예언자적 자세로 수도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애쓴 인물이다.

그의 신비체험은 매우 유명해서 르네상스 말기의 조각가 베르니니가 남긴 '성 테레사의 황홀'은 당시의 극적인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작품은 테레사가 꿈에 아기 천사가 나타나 불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는 순간 고통과 함께 극치의 황홀감을 경험했다는 꿈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나카야마 미키,

여성으로는 드물게 새로운 종교창시자로 우뚝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말고도 불교에서도 매우 뛰어난 수행자가 있었다. 인도의 프라기야타라는 중국 선종의 시조로 알려진 달마선사의 스승이었고 티벳불교의 마칙 랍된도 잘 알려진 지도자였다. 그는 인간의 형태로 나타난 신성한 존재인 다끼니 중의 한 명으로 티벳의 모든 학파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했다.

이외에도 언급은 안됐지만 수많은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차별과 박해 속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근대에 이르러 종교적으로 가장 극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1838년 일본에서 천리교(天理敎, 일본에서는 덴리교)를 개창한 나카야마 미키라고 할 수 있다. 에도막부 시절 농민출신인 미키는 원래 정토종 신자였으나 오랜 수련 끝에 41세에 신통을 체험하고 사람들이 신과 하나가 되어 즐겁게 살아가는 왕국을 추구했다.

그는 세계는 타락한 곳으로 탐욕이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원래 신과 하나였던 깨끗한 세계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으며 현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버이신인 천리왕명(天理王命, 덴리오노미고토, 한국에서는 천리왕님이라고 부른다)이라는 세계의 창조주(유일신)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설교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재산을 비롯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등 자비를 베풀고 병자들을 고치는 기적을 보여주면서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러나 새로운 왕국에 대한 메시야적 가르침과 "천황이나 농사꾼이나 다 같은 혼이며 나의 자녀"라고 주장해 국가와 충돌을 빚었다. 미키는 결국 여러 차례 투옥 당했고 천리교 역시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는 사후 신의 현신이면서 영적 존재(오야사마)로서 신자들을 돌보는 존재로 숭배되고 있고 그의 사상과 신앙은 이부리 이조라는 인물에게 계승되었다. 이조는 불교적인 요소와 신도(神道)의 사상을 일부 끌어들여 천리교의 교리와 의례를 만들었다. 천리교는 현재 일본에만 약 2백여만 명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키의 삶에 대해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은 1981년 6월 해인사에서 열린 대중법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바 있다.

"…….일본 천리교(天理敎)의 교조되는 사람이 '나카야마 미키'라는 여자 분입니다…….이 사람이 공부를 해서 자기 딴에는 마음의 눈을 떠버렸습니다. 눈을 뜨고 보니 자기 살림살이는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중략) 

그리하여 재산을 다 팔아서 모두 남에게 줘버렸습니다. 이제 (미키)내외는 빈손이 되었습니다. 밥은 얻어먹으면서 무엇이든지 남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남에게 좋은 것, 남 도우는 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의 몸으로 일본 역사상 유명한 큰 인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돈벌이를 크게 한 것입니다. 우선의 조그만 살림살이를 나눠주고서는. 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나도 큰 살림살이를 한번 해 봐야겠다.' 이렇게 작정하고 집도 팔고 밭도 팔고 다 팔사람 있습니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기 재산 온통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 나누어 준다면! 그렇게만 되면 내가 목탁 가지고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을 위해 아침저녁으로 예불하며 모실 것입니다……."

그러나 미키 사후 천리교는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50년 가까이 신도에 예속되고 교단지(敎團紙)를 정부가 발행하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국가종교에 머무는 수치를 당했다.

비슷한 시기 창가학회(SGI)의 창립자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그 제자인 도다 조세이가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마키구치가 옥사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 초라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 천리교 지도자들의 신앙과 담력이 창시자인 미키에 비해 훨씬 못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위에서 언급한 여성들은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남성 종교지도자들 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오늘날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남성 중심의 세계관이 파탄난 상황에서 여성의 역할은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지구적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양성평등이 대세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더 많은 여성 종교지도자들이 필요한 상황하다. 이런 상황에서 시효가 다된 채 권력과 물질에 눈이 먼 가부장적인 종교를 대체하기 위해 위대한 영성과 지도력을 가진 여성이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야 시점이 온 것 같다. 그때를 간절히 기다려본다.

 백찬홍/유영모, 함석헌을 선생을 기리는 재단법인 씨알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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