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선생 탄신 108주년 기념 심포지움 열려

 

함석헌 전집 30권이 한길사에서 완간되었다. 함석헌 선생 서거 20주기와 탄생 108주년을 즈음하여 '함석헌저작집'을 간행하면서 김영호 원장(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은 "함석헌 선생의  말씀과 글은 험난한 20세기를 온몸으로 산 한 사상가의 역사현장의 증언"이라면서 "선생의 저작은 상아탑 연구실이나 책상머리에서 쓴 것이 아니고 몸소 체험하면서 가슴에서 토해낸 민족자서전"이라고 말했다. 

한편 4월 1일 오후 6시에 교보문고 본사 문화이벤트홀에서 출판기념회를 곁들인 기념심포지엄에서는 함석헌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김경재 교수(한신대)와 박태순(소설가), 강영안 교수(서강대)가 발제를 했으며, 이어 함석헌의 글을 판소리로 창작한 <판소리 압록강>을 민은경씨가 공연했으며, 정지영 영화감독과 김순영(문화를 나누는 사람들 이사), 이수호(민노동당 최고위원)씨 등이 함석헌의 '인간혁명', '비폭력혁명', '저항의 철학'이라는 글을 낭독하였다. 

바보새. 함석헌의 "너 자신을 혁명하라"

10여년 넘게 전공자로서 '함석헌 읽기'를 해 온 김진에 따르면, 신천옹(信天翁) '바보새'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그가 죽은 기일(忌日)보다는 생일을 기념하고 축하한다. 비록 그의 육신은 이 땅에 없지만 그의 넓고 푸른 뜻은 아직도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함석헌을 '바보새'라 부르는 이유는 그의 시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네가 되고 싶다/ 가파른 산 위를 오르다/ 어느덧 그토록 깊은 외로움에 곤두박친/ 네가 되고 싶다// 숨결이 갈라지고 네 등언저리에 몰아쳤던 스산한 눈빛이/ 내 얼굴에 쏟아진다 해도/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없이 살다/ 없이 간 이/ 그토록 자유로이 참을 통해 날아간 비행 따라/ 내 날개도 환하게 펼쳐질 수 있다면/ 네 수모가 오늘 내게 비수가 되고/ 네 눈물이 지금 내 뺨에 다시 흐른다 해도/ 나는 네가 되고 싶다// 아직도 나는 백살배기 바보새/ 나는 네가 되고 싶다"

김진씨는 함석헌의 글을 모아 <너 자신을 혁명하라>는 책을 썼다. 그가 본 함석헌의 열쇠말이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혁명은 하늘에서 내린 명(命)을 새롭게[革] 하는 것을 뜻한다. 함석헌은 사회혁명 이전에 자기혁명, 씨알혁명을 강조했다. '참 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씨알이 삶(개인)과 씨알혁명(사회)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는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희망하고 그것에 헌신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혁명'해야 한다. 함석헌은 자기 혁명 없는 사회적 실천, 실천 없는 자기명상은 결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지 못한다고 강조했다. 함석헌이 말하는 자기혁명은  마음이 제 주인인줄 알고 혼이 '참'(진리)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마음이 주인인 줄 아는 사람은  마음 맑히기를 힘쓰고 마음이 맑아서 보면 참이 보인다. 어떤 것이 막음이요 어떤 것이 흐림인가? 전체의 참을 볼 수 있는 눈이 맑은 눈이요, 전체를 모르고 부분만 보는 눈은 흐린 눈이다. 나만 아니라 남을 아는, 이제만 아니라 영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보면 역사는 결코 사납고 강한 자의 것이 아니고 착하고 부드러운 자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소경에게 빛을 말할 수 없듯이, 믿지 않는 자에게 정신의 세계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열린 마음이 않고서야 '자유를 주는 참'을 찾을 수 없다고 함석헌은 말한다.

"먼저 먹은 술이 좋다 해서 새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려는 것이 닫힌 마음이요, 진리에다 무한성을 허락해서, 내 아는 것은 요것이지만 그 밖에도 얼마든지 넓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여, 새로 더 배울 생각을 하는 것이 열린 마음이다. 하나는 종의 마음이요, 또 하나는 아들의 마음이다. 하늘나라를 지키잔 것은 종이요, 하늘나라를 내 집으로 내 마음대로 쓰잔 것은 아들이다. 종놈들은 문간에서 지켜라, 우리는 마음대로 뒤져 그 속을 알고 불편이 있으면 고치고 부족하면 더 지으면서 살리라!"

함석헌은 1901년 3월 13일에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나 1921년에 평생 스승이 된 유영모 선생을 오산학교에서 만나고,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시절에 우치무라 간조 선생에게 무교회(無敎會)주의를 전수받고 귀국해서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성서조선>에 '성서의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개정된 이 대표적 저작에서 보듯이, 함석헌은 역사와 신앙을 통합하는 사상을 가졌다. 그는 종놈같이 교회의 문턱을 지키지 않으면서, 손에 주어진 성서를 독창적으로 해석하면서 평생 들사람(野人)으로 살았다. 

사진출처/연합뉴스

빈들에서 님 앞에 바친 생애

1958년에는 장준하씨가 발행하던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을 게재하여 옥고를 치르고, 유신정권이 들어서자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여 군사정권에 맞섰다. 윤보선, 김대중씨와 더불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고, 1976년에는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감옥을 '대학'이라 부르면서 들락거렸으며, 광주민중항쟁으로 <씨알의 소리>가 폐간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는 단도암 수술을 받고 1989년 2월 4일에 여든여덟의 나이로 이승을 떠났다.

그가 지은 처음 시집인 <수평선 너머>은 서문에 그의 생애를 담아서 보여주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 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 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

이렇게 겸손할 말을 하면서 결국 남는 말은 님 향한 님을 위한 노래가 그이 생애였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시인이요 종교가요 혁명가요 사상가였다. 그리고 세상과 교회를 혁신하기 위해 길을 가는 '빈들에 외치는 소리'였다.    

나는 빈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때는 이나 소리도 없이/ 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그날이 오면, 내 빛으로 오는 때면,/ 그때에 내 소리 없이 하는 말,/ 얼굴 얼굴 맞대고 입 입 맞추고/ 부끄럼 없이 두려움 없이 애탐도 없이/ 어엿이 은근히 간절히 하는 말,/ "나를 보라, 나를 본 자 누구나/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한상봉/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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