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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아가야, 사랑해[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32]

지금 메리는 유치원 방학 중이다. 맞벌이를 하는 종일반 아이들은 일주일 방학이지만 반일반 메리는 3주간의 방학을 맞이하였다. 3주? 세 아이와 3주 동안 삼복더위를 보내다 보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저 멀리 북극에서는 빙하가 녹아 북극곰 친구들은 집을 잃고, 여기 대한민국 어떤 엄마는 이성을 잃고 말 것이다. 이런 때를 위해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무지개색 초호화 간이 풀장에 각종 물놀이 장난감, 수영복까지 준비해 놓고 그곳에서 날 찾지 않고 오래도록 살아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불러댔고, 뜨거운 태양은 아이들을 지글지글 구워 먹고 태워 먹더니 우리 부부의 야심작 1만 2000원짜리 초호화 풀장까지 녹여 먹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빵구가 나서 기포가 보골보골 올라오는 바람 빠진 풀장엔 개구리가 놀러 와 살았다.

   
▲ 풀장에 물 채우는 욜라. 바닥에 초록색 테이프로 구멍을 메운 것이 보인다. ⓒ김혜율

갯벌의 전지훈련

그렇다면 이번엔 바다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서해 바다로 갔다. 어쩐지 아득하게 보이는 바다였다. 나는 조금 들떠서 “메리야, 욜라야 우리 바닷물에 발 담가 볼까? 엄마랑 같이 가 보자”하고는 바다를 향해 걸었다. 그런데 걸어도 걸어도 바다가 안 나왔다. 이건 무슨 신기루인가. 바닷물이 저쪽 수평선에 최대한으로 쪼그라져 밀려 가 있었고 그만큼의 광활한 갯벌이 펼쳐져 있는 것이었다. 보통 남해 바다에서 놀던 나는 제대로 된 갯벌의 서해바다는 이번이 처음인 것을 깨달으며 바다까지 이 악물고 걸었다. 그래놓고 뒤따라온 남편이 아이들과 바다에 입수를 할 때에는 나는 로를 안고 바닷물에 발만 깨작깨작 적셨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로를 안고 있는 내 팔이 점점 저려 온다는 것. 바닥은 진흙이고 나에겐 여벌옷이 없다. 로에게 머드팩을 해 주기 싫다면 해변가에 펼쳐 둔 우리 돗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로를 거기에 누이고 앉아서 쉬고 싶었다. 그래서 걷기 시작한 길. 아뿔싸, 되돌아갈 때도 올 때와 같이 걸어도 걸어도 진흙길. 돗자리는 멀기만 하고...이제 로는 점점 내려와 허벅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결국은 아이들과 실컷 수영을 하고 나온 남편이 로를 받아 줄 때까지 갯벌 한 가운데서 꽃게만큼도 못 움직이고 로를 오른쪽 어깨에 걸쳤다가 왼쪽 옆구리에 꼈다가 무릎에 눕혔다가 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전지훈련을 하러 바다에 갔던 것일까.

계곡도 별로

갯벌 위 전지훈련의 통증이 서서히 가실 무렵 여름을 맞아 우리 집에 놀러 온 동생네 식구들과 계곡에 갔다. 계곡이라면 이 무더운 더위를 날려 보내는 제대로 된 피서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계곡 바로 옆엔 직접 키운 닭으로 조리하는 백숙집이 있어서 체력보충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왔다가는 깊지 않은 계곡은 물이 맑지 않았고 어디선가 쓰레기 냄새가 올라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미, 파리, 각종 기어 다니는 벌레들.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자연과 사람이 다녀간 추악한 흔적들이 버무려져 나를 골 때리게 한다. 그래도 나.... 시골에서 살고 있는데 여긴 왜 또 다른 세상이지. 아아아 적응 안 돼. 무서워. 내 위에 그늘을 드리워 주는 커다란 뽕나무가 쌔액쌕 소리치는 것 같다. “여기 왜 왔어. 여긴 우리 구역인데. 좀 작작들 해”하면서 짜증을 내는 것 같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계곡물에 뛰어들어 신나게 놀고 있는데 나는 돗자리에 앉아서 로에게 부채질을 해 주며 빨리 떠나고 싶어 안절부절 못하였다. 나는 그냥 도시에서 살아야 하나 봐, 계곡물에 손 담그기도 찝찝해서 꺼리는 내 자신이 정말 싫었다. 자연을 좋아한다지만 그건 순전히 인간이 다듬어 놓은 인위적인 자연일 뿐, 조금만 야생으로 들어가면 감당을 못하니. 그렇게 계곡에선 닭만 잡아먹고는 일찌감치 집으로 왔다.

집 떠나면 개고생, 집이 제일이야 그냥 시원하게 선풍기바람 쐬면서 책이나 보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집은 덥고 책은 지루했고 풀장 구멍은 자꾸만 늘어나고 방학은 아직도 남아돈다.

   
▲ 갯벌에 있는 욜라(왼쪽)과 메리. 바다는 실제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다. ⓒ김혜율

시어머니 찬스

자, 이쯤에서 비장의 카드. 시어머니 찬스를 쓰기로 하였다. 메리와 욜라를 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시댁에 맡겨 놓고 남편 일을 핑계 대거나 병원에 가 볼 일이 있다고 하며 내빼는 것이다. 메리 방학맞이 흔치 않은 기회로 4박 5일 뒤 데리러 오겠다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젖먹이 로는 데리고 나온다고 해도 감격스러울 따름이다.

급격하게 자유로워진 남편과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나머지 하루를 어떻게 재밌고 알차게 보낼지 생각하며 행복에 겨워 몸서리친다. 도서관에 가서 책도 빌리고 마트에 가서 과자도 잔뜩 사고 이것저것 장도 보았다. ‘아이들 없는 오늘 저녁’을 활활 불태우고 싶어라. 오늘 밤엔 잠도 자지 않고 놀 테야. 하면서 신이 났다. 찾는 주인 없어 쓸쓸한 아이들의 장난감을 보고선 메리와 욜라가 보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지만 ‘이러면 안 돼 약해지지 말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철저히 이기적이 되기로 했잖아.’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아이들이 빠진 생활은 평화로우면서도 심심하고 처음에 거창하게 마음먹은 것과는 달리 그냥저냥 시간을 보내고 만다. 그러다가 메리와 욜라를 데려오기로 한 날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조여 오는 압박감이란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도 같을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후딱 지나가고 아이들이 오는 밤. 시댁에서 저녁까지 먹이고 이까지 닦이는 치밀함을 발휘, 집에 오는 동안 차에서 곯아떨어지게 해 주십사하는 마지막 소망을 싣고 남편의 차는 달린다. 그 사이 나는 심호흡 크게 하며 아이들 맞을 준비를 한다. “로~ 누나랑 형이랑 조금 있으면 집에 온단다. 아이 신나? 좋지? 그치? 으응? 오호호호 랄랄랄라~ ”왠지 내가 반쯤 실성한 것 같다.

아가야, 사랑해

마당에 차가 선다. 예상대로 차에서 잠든 아이들이 차례로 제 아빠한테 안겨 들어오는 모습에 안도감과 반가움이 인다. 자는 아이들 얼굴을 쳐다보니 며칠 사이 부쩍 큰 것 같다. 이마 한번 쓸어 주고 다리도 펴 주고 모기장을 닫고 방을 나오는데 그제서야 요 며칠 영 썰렁했던 집이 가득 찬 것 같은 훈훈함이 느껴진다.

그리고 메리의 가방을 정리하는데 종이편지가 가득 나왔다. 그 편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
엄마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무지개 그림과 파란 드레스 입고 은색으로 땋은 머리의 엘사 그림도 있다.

딸의 편지와 그림들을 보면서 나도 마음으로 답장을 한다.


“메리야,
엄마가 잠시나마 널 잊으려고 애쓴 시간, 아가. 넌 그 때도 이 엄마생각 했구나.
고마워.
엄마도 사랑해.
메리, 욜라 사랑해.
그리고 집에 와서 무척 기뻐.
엄마가”

 

 
 

김혜율 (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4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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