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홍콩 동부의 작은 섬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 타이완, 홍콩의 젊은이 50명과 함께 닷새 동안 모임을 했다. 이번 피정의 주제는 “동아시아에서 땅의 소금이 된다는 것.” 떼제에서처럼 매일 세 차례 함께 기도하고 성경 묵상, 침묵, 소그룹 대화를 했다. 또 자기 나라의 중요한 이슈에 대해서 발표하고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었다.

참가자들의 나이는 스무 살 안팎에서 삼십대 중후반까지, 가톨릭과 성공회, 여러 개신교회 배경에 직업도 다양했다. 모두 젓가락을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이라 그런지 문화적, 정서적으로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어설픈 영어와 서투른 중국말에 한국말, 일본말 통역을 섞어 가면서도 깊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 가까워졌다.

식사 시간과 소그룹 대화 때는 너무나 재미난 듯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쉼 없이 터져 나왔지만 모두 모여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얘기할 때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나라별로 한 가지씩 발표하도록 부탁했는데, 홍콩의 우산 혁명, 한국의 세월호, 타이완의 해바라기 운동, 일본의 안보 법안 반대, 중국의 환경오염 문제 등이 얘기되었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고 1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 한국청년이 자기 얘기를 들려 주기도 했다.

▲ 십자가 주위에서 드리는 기도. ⓒHackman Chan

홍콩의 우산 운동

홍콩의 젊은이들은 아주 심각한 어조로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었다. “'우산 혁명'은 외국 언론이 붙여 준 이름이고 '우산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홍콩의 지도자를 뽑는 직접 보통선거를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경찰이 최루탄을 난사하면서 엄청난 규모로 커졌어요.” 몇 달 전까지 홍콩의 금융과 상업의 중심가를 점거했던 운동의 결과, 젊은 세대들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너무나 평범하고 비정치적이었던 이곳의 청년 세대들이, 말하자면 모두 의식화되었다!

좁은 땅덩어리에 인구가 밀집한 곳이고 SNS가 발전한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시위 상황을 이야기하던 씨씨의 목소리가 여러 번 떨렸다. “경찰에 포위되어 있을 때 정말 두려웠어요.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몰랐어요. 나는 여성으로서 물리적인 위협을 느꼈고 실제로 얻어맞기도 했어요....” 나는 머슴애처럼 늘 발랄하던 씨씨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

“민주주의는 희생 없이 얻어지는 것도 대가 없이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어요.” 금융계에서 일하는 하크만이 말했다. “많은 사람이 시위와 점거로 인한 홍콩의 경제 침체를 염려했지만, 민주주의와 자유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라 믿습니다.” 이웃 나라 청년들이 자신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공감하는 데서 홍콩 젊은이들은 고무되었다.

씨씨가 기타를 치면서 우산 운동의 주제가처럼 된 노래를 광둥말로 부르기 시작했다. 스크린에는 우산 운동의 여러 장면들이 펼쳐졌고 홍콩 청년들은 모두 주먹을 쥐거나 우산을 펼쳐 들고 함께 불렀다.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불안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망을 담은 그들의 노래는 기도가 되어 뜨겁게 울려 퍼졌다.

작년에 홍콩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기도회가 예정된 주룽의 성공회 대성당은 몽콕에서 5분 거리였다. 상업의 중심인 몽콕의 긴 도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텐트로 뒤덮여 있었고 그 가운데는 “거리의 성 프란치스코 경당”이라는 천막도 있었다. 가톨릭과 성공회 청년들이 거기서 매일 성무일도와 떼제의 기도를 한다고 했다. 몇몇 청년들은 성공회 성당으로 와서 내게 인사만 하고 바로 비장한 모습으로 시위에 나갔다. 그날 저녁 우리가 모여 기도를 하던 그 시간에 여러 주 동안 계속되던 점거와 시위가 강제로 진압되었고 텐트는 모두 철거되었다. 하지만 우산 운동은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젊은이들은 통해 확인했다.

기도하고 행동하는 젊은이들

타이완 청년들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토건업자와 정부가 결탁해서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토지' 문제와 지난봄에 벌어진 민주화운동인 '해바라기 운동'에 대해 얘기했다.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온 참가자들은 타이완의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에 대해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이에 반해 홍콩과 타이완의 젊은이들은 중국 본토와의 관계에서 오는 일종의 동병상련 때문일까, 우산 운동과 해바라기 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서로 많은 관심을 보이고 연대를 표시했다고 한다.

가오슝에서 온 마이크는 지난봄의 체험을 시종 조용하게 얘기했지만, 영상 자료와 함께 해바라기 운동의 감동은 더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민주화 시위의 결과 우리가 반대한 법안이 무효화되었지만, 국민들의 관심이 식으면 정부는 어떤 형태로든 다시 통과시킬 것이 분명해요.” “우리가 어렸을 때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부모님조차 이제는 '괜히 나서서 자신이 손해 볼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정치인들과 기성 세대에 대한 타이완 젊은이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공감을 자아냈다.

한국 젊은이들은 세월호 사건의 트라우마를 말하면서 유가족들의 아픔을 나누려는 노력을 소개하고 노란 리본을 나누어 주었다. 관련 동영상이 상영될 때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고 짙은 분노와 깊은 아픔이 담긴 발표 뒤에 우리는 한참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베이징의 한 환경 관련 NGO에서 일하는 샤샤는 중국의 환경오염 문제에 대한 발표에 앞서 최근 저장성에서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의 십자가를 강제로 철거하는 것에 대해 크게 걱정했다.

“정부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자행하고 있지만 우리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 너무 슬픕니다. 홍콩과 타이완에서 민주화 시위를 한 것에 대해 이번에 많이 들었지만 우리 중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다른 나라의 발표를 들으면서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어떻게 항의하는지 보여 줄 게 없어서 마음이 무거웠는데, 어젯밤 SNS에서 원저우 교구의 신부님들이 단체로 정부 청사 앞에 가서 항의 시위를 하는 사진을 보고 복사했어요.”

일본에서는 젊은이들이 거리에 뛰쳐나가 시위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어렵다고 한다. 가두 시위는 극우파의 전유물이다. 그런데 세이라는 청년이 이번에 난생 처음 시위에 나섰다. “아베 정권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안보 관련 법안을 졸속으로 통과시킨 다음 우리는 모두 엄청 분노했어요. 일본이 과거에 대해 깊이 반성하게 하고 군대를 가질 수도 없고 외국에서 군사 행동을 할 수 없도록 못 박은 평화 헌법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언론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있어요.” 정치에 관심이 없고 투표도 하지 않은 일본 젊은이들에게서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여러 나라 청년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감동했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떼제의 기도 모임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청년들이었는데 기도하는 청년은 동시에 사회 정의와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청년들을 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학업과 취직, 결혼에 대한 엄청난 압박과 부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은 더 인간적이고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면서 그것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기도는 내적인 평화와 함께 거기에 필요한 역량을 길러내는 샘이기도 하다. 나는 동아시아의 젊은이들이 서로 만나 우정을 나누고 연대를 깊게 하는 기회를 앞으로 계속 만들어 나가기로 다짐했다.

▲ 기도회에 참가한 청년들과의 단체 사진. ⓒ김경전

식민시대 가톨릭 신자들의 무장봉기

피정 장소였던 임틴차이(鹽田仔 작은 염전이라는 뜻)는 홍콩 동북부 사이쿵의 작은 섬으로 선착장에서 통통배를 타고 20분가량 가면 도착한다. 중국 북부에서 이민 온 하카[客家] 사람들  마을이었던 이곳은 19세기 후반에 가톨릭 신자들의 교우촌을 이루었다. 말씀의 선교 수도회의 창설 멤버였던 요셉 프라이나데메츠 신부가 본격적으로 중국 선교를 하기 전에 언어와 풍습을 익히려고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우리와 가까운 친구인 홍콩교구 총대리 찬 도미니코 신부가 이곳 출신이다. 나는 찬 신부의 소개로 몇 해 전 이곳에 혼자 와서 피정을 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모두 도시나 외국으로 이주하고 버려진 마을에 성당을 보수하고 순례자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한 것도 찬 신부의 정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여기 머물면서 이곳의 역사를 찾아보니 재미있는 것이 하나 나왔다.

1841년에 홍콩에 가톨릭 선교사가 파견되었고 1866년에 섬마을 임틴차이의 찬(陳)씨 일가 30명이 세례를 받았다. 첫 선교사였였던 볼론타리 신부는 이곳에 가톨릭 공동체를 세우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또 다른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1867년부터 1869년 사이에 마을 주민들이 워낙 가난했고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지역 호족에게 내어야 할 엄청난 세금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참을 수 없는 불의를 목격한 볼론타리 신부는 주민들이 무장해서 항거하도록 도왔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죽었다. 볼론타리 신부는 결국 허난 성으로 전보되었다. 150년 전 제국주의, 식민주의 시대의 일이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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