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교황방한 1주년에 즈음해서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복음서에 쓰여진 이 놀라운 구절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천장에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를 ‘초대 교황’이라 불렀다. 교황이란 ‘로마의 주교’를 지칭하는 말인데, 바오로와 다르게 베드로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대상으로 선교에 나섰던 인물로, 로마인들의 주교였던 적이 없다. 또한 바오로는 로마의 시민권이 있었으나, 베드로는 갈릴래아 어부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그는 다만 로마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로마 주교인 교황이 왜 ‘어부의 반지’를 손가락에 끼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복음서의 기록 대로 베드로를 가톨릭교회의 최고지도자로 삼는다고 해도 왜 굳이 로마의 주교가 ‘교황’인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제국이 교회를 삼켰다, 교황 군주제

이것은 가톨릭교회가 순교자의 핏방울 위에 세워진 종교이며, 베드로의 순교지를 그의 고향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논리에서만 의미가 생긴다. 그래서 제국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 대성전을 베드로의 순교지로 지목된 바티칸 언덕에 세웠다. 당시 이곳은 이미 로마인들이 공동묘지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수백 개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훼손하면서 잡석을 채워 대성당의 기초로 삼았다. 그래서 “교황연대기”를 쓴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베드로 대성전을 일종의 ‘베드로 전승 기념비’라고 불렀다. 유대인 베드로가 제국인 로마를 정복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실상 제국인 로마가 가톨릭교회를 삼켜버렸기 때문에 로마의 주교가 교황이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로마는 마침 제국의 수도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해 로마제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으며, 십자가형을 폐지하고, 321년에는 일요일을 법적 휴일로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8세기 경에 발견된 ‘콘스탄티누스 기증서’라는 문서가 교황의 서방교회 지배권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이때까지 ‘교황(Papas)’이라는 호칭은 교회 원로들에게 일반적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로마 주교만 독점적으로 사용했다.

로마의 주교 실베스테르 1세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나병을 고쳐주고 감사의 표시로 로마와 다른 속주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등 서로마제국의 통치를 영원히 위임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1440년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에 의해 이 문서는 로마 교황청 내부에서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지만, 오랫동안 로마교회의 수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교리들은 대부분 로마가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선포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미 로마를 떠나 보스포루스 해협의 콘스탄티노폴리스(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313년 즉위식을 했고, 제국도 ‘비잔티움’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성묘성당을 짓고, 새 수도에는 성 소피아 성당의 건립을 명했다.

사실상 가톨릭교회는 본질적으로 지중해 동부 연안의 종교였다.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스, 바오로 사도가 선교했던 지금의 터키 땅이 그리스도인들의 주 무대였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로마제국 제2의 도시였고, 안티오키아가 제3의 도시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1의 도시였다. 특히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Christian)란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이다. 당시 그리스도교의 제1 언어는 그리스어였다. 4세기까지 미사전례도 그리스어로 통용되었다. 알다시피 고대 교회 주교들은 빼어난 지식인들이었고, 당시 로마의 주교들도 대부분 그리스인이었다. 그리고 ‘가톨릭’이란 말도 110년경 원형경기장에서 사자 밥이 된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가 처음으로 종교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가톨릭교회에서도 여전히 권력싸움이었고, 최종적으로 서방에서 승전보를 올린 로마 교회가 교황권을 확립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일찍 멸망하면서 동로마교회도 무너지고, 서로마 교회만 살아남아 가톨릭교회의 주권을 독차지했다. 로마시대에 제국이 황제의 소유였듯이, 교황은 교회를 소유함으로써 세상마저 소유하려고 황제들과 패권을 다투었다. 제국에서 황제가 하느님으로 숭배된 것처럼, 교회에서 교황은 하느님처럼 숭배되었다. 로마가 황제의 나라였다면, 가톨릭교회는 교황의 종교였다. 그리고 세속권력이 부침을 거듭하는 동안 유럽에서 교황권만이 천상과 지상, 교회를 통치하는 독점적인 지위를 얻었다.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이 교황의 삼층관을 없애기까지 ‘상징적 차원’에서는 교황권에 버금가는 권력은 없었다.

▲ 가톨릭교회는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교회다. 그러나 베드로는 로마의 주교가 아니라 갈릴래아의 어부였다. ⓒ김용길

목수와 어부들의 종교, 형제와 친구들의 나라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주님으로 섬기는 분이 ‘목수’였으며, 초대 교황이 ‘어부’였다는 점은 지금 생각해도 신선하다. 그들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하느님이 이집트 노예들을 해방시킨 분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한”이가 예수였고, 교회의 반석이라는 베드로가 어부라고 할 때, 그들이 종교를 만들지 않고 당파를 구성했다면 아마도 ‘노동당’이라는 이름이 적당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 베유는 적절하게도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고 불렀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지난 2000년 동안 ‘교황 군주제’를 고집해 왔다. 세계교회의 모든 주교들의 임명권은 교황에게 집중되었고, 교황은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위치에서 흔들린 적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교황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이러한 구조는 복음서가 가르친 ‘섬기는 자의 공동체’와 상관없는 일탈이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군주제적 교황중심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거듭되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은 그동안 사용해 온 군주제적 호칭과 관습을 폐지하는 데 주력했다. 교황관을 없애고 대관식을 즉위미사로 바꾸었다. 추기경 각하, 주교 전하라는 말도 이제는 쓰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해 8월 방한 때 적절히 말했듯이, 교황에게 다른 주교들은 ‘형제’요, 모든 신자들은 교황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교황을 비롯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누누이 강조한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렸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땅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되어야 했다. 교황은 ‘교황의 종교’를 노예와 목수와 어부들의 종교를 돌려놓으려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예수가 어린 나귀를 타고 군중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듯이, 낮은 자리로 향한다. 이런 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오래된 미래’의 청사진을 다시 보여 주고 있다. 여전히 꿈쩍도 않는 교회를 향해 돌을 날리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가 조선을 바꾸지 못한 것처럼, 교황의 몇 마디가 교회를 바꾸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한국교회의 사제들이 아무리 강정에서, 밀양에서, 평택에서, 대한문에서, 광화문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과 생명평화를 목놓아 외친다 해도 교회는 바뀌지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교회 신자들은 사제들의 이런 행동이 뜬금없다는 표정이다. 교황의 권고문 “복음의 기쁨”을 읽어 주어도 춤추지 않는다.

교황과 사제들이 세상과 교회를 바꾸는 시대는 지나갔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실패할 공산이 너무도 크다. 대다수 평신도들의 신앙감각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 신앙감각을 자극하지 않고서 교회는 바뀌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작업이고, 깊이 숙고하고 본당생활의 바닥에서 올라오는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절박한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마땅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 중요한 것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복음적 열정이 식은 하느님 백성들을 다시 일깨워 소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소집의 주체는 주교와 사제들의 지지와 영적 동의를 얻은 평신도 리더십이다. 그 리더십에 대한 관심이  없는 종교운동은 희망이 없다.

▲ 교회개혁은 교황의 의중에 달린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감각의 변화에 달려 있다. ⓒ김용길

순종의 대상은 교황이 아니라 복음

교회개혁에 대한 섬세하고 고단한 작업에 자신이 없을 때 발생하는 현상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가 ‘나홀로 투쟁’이다. 잘난 나만 선두에 서서 교회개혁과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교황의 권위 뒤로 숨어서 소리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이참에 돈벌이나 하자는 것이다. 내가 믿는 진리를 타인에게 설득할 능력과 자신도 마음도 없는 이들은 혼자서 고독하게 현장에 가서 살림을 차린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이런 삶은 복음에 비추어 너무나 중요한 일이지만, 특히 사제들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너무나 쉬운 선택이다. 그냥 거기서 개기면 된다. 현장에 오지 않는 이들은 아직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이등 신자’가 된다. 그들을 설득하기는 힘들어도 경멸하기는 쉽다. 예수시대에 광야에서 ‘저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에세네 파 사람들이 했던 일이다.

말끝마다 교황의 어록을 뒤적이는 태도 역시 교회 내 진보세력의 아주 쉬운 선택이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최고권력이므로, 그 권위에 기대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그래서 그 말에 대한 책임 역시 교황에게 미룬다. 안전한 방법이다. 전략적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인용할 수 있다. 실제로 현 교황은 어느 누구보다 복음적이며 진취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교황의 종교’를 강화시킨다. 지금 교황이 진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해서, 신자들에게 교황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는 비민주적 태도가 민주주의를 결국 압살한다. 다음 교황이 보수적인 사람이 된다면, 이내 ‘교황에 대한 순종’에서 ‘저항’으로 옮아가는 일관성 없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

지난 8월 2일 경남 산청 성심원에서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우일 주교가 정의롭고 형제적인 사회를 위해 강력하게 정부와 대법원을 비판하는 강론을 했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교황이 해방신학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이들을 옹호했던 것처럼, 강우일 주교는 교황을 언급하지 않고도 복음의 기쁨을 설파했다. 중요한 것은 교황이 아니라 ‘복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교황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충실성이다. 주교든 사제든 수도자든 진보언론이든 자신의 복음적 진보성을 ‘교황’에게서 보증 받으려는 태도는 위험하다.

개혁교황도 상품화, 영적 세속화 아닌가?

최근 흥미로운 시도가 청주교구에서 발표되었다. 청주교구에서는 가을에 열리는 청년대회에서 ‘사회교리 골든벨’ 경연대회를 하겠다는 소식이다. 이날 청년대회의 주제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젊은이’이며, 주제 성구는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사회교리에 대한 신자들의 몰이해를 한탄하기만 했다.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사회교리 학교를 하지만 몇몇 신자들만 참석할 뿐이다. 사실상 이런 신자들은 사회교리를 배우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사회교리 자체에 영 관심이 없는 신자들에게도 사회교리가 상식이 될 수 있도록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정말 교구장과 본당 사제들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믿음에 동의한다면 신자들이 텔레비전의 요리 경연만큼 경쟁적으로 사회교리를 배우도록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당장 실행해야 한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회적 참상에 아파하고, 경제독재를 비판하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려고 노력할 때, 한국교회에서 한 일은 그저 모금운동 뿐이었다. 한국교회에서 만인의 존경을 받아온 이태석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의 이름으로 행한 것이 무엇인가? 그저 모금운동 밖에 없다. 이태석 신부와 김수환 추기경은 한국교회의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정신은 사라지고 돈만 남아서 교회 안에서 여전히 시끄러운 잡음을 남기고 있다. 일부 교구에서는 지방자치단체와 합동으로 ‘교황 브랜드’를 개발하고 있다. 순교자를 가장 욕 되게 하는 짓이 ‘돈벌이를 위한 성역화 사업’이듯이, 교황을 가장 욕 되게 하는 짓은 교황을 종교적 ‘관광’상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영적 세속화’라고 지적한 일만 골라서 하는 특출난 재주가 있는 것 같아 안쓰럽다.

교회개혁의 새벽은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멀었다. 교회개혁을 바라는 이부터 자신을 개혁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조차도 ‘가난한 이들을 볼모로 한 기획 상품’으로 만드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 사회적 진보세력의 꿈이 다들 국회의원이 되는 것이 아니었듯이, 교황을 존경하는 이들의 꿈이 ‘사업’이 아니라, 겸손한 투신이기를 바란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헤아리고 살피는 자비 안에 있기를 바란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보다 더 소중한 과업이 ‘그럼에도 사랑하는 것’임을 확인하기 바란다. 개혁의 대상은 수시로 바뀔 수 있다. 오늘 교회개혁을 부르짖는 나 자신이 내일은 개혁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내 안에 어둠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개혁의 새벽은 교회 안에도 찾아오고, 나 자신의 심장을 향해서도 파고들고 있다. 아프다.

▲ 교회개혁은 교황 중심주의에서 복음 중심주의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표현했다. ⓒ한상봉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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