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8월 9일(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1열왕 19,4-8

요한 복음사가에 의하면, 예수님은 “한처음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땅에서 살았습니다. 다시 그분은 하늘로 돌아갔고, 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갑니다. 말씀에서 사람으로 그리고 빵으로.... 인간에 대한 끝없는 그분의 마음이고, 예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 구원의 역사를 보면 눈시울을 적실 때가 많습니다.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이 참 지독하리만큼 절대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약에서는 당신 백성을 굶어 죽지 않게 하시려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고, 인간성을 잃지 않도록 말씀을 통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신약에 들어와서는 아예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생명이 이 세상에 들어오신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삶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음이 아픈 이들을 위로하고,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영에 사로잡힌 이들을 풀어 주고, 몸이 아프고 병든 이들을 치유했습니다. 그분의 치유는 단지 몸을 낫게 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생명을 되돌려 주는 행위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인간성을 회복하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회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을 진정 만난 이들은 그분을 생명으로 체험했습니다.

죽음에서 빵을 먹고 생명을 얻었던 사람을 우리는 루카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에게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버리자 모든 것이 끝났다고, 모든 것이 죽어 버렸다고,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렇게 신나고 힘을 얻었던 자신들의 삶도 끝나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캄캄한 절망감을 안고 엠마오로 돌아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고,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먹으면서 예수를 알아봤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죽어 있던 그들의 삶이 살아났고, 그들이 떠나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다른 제자들에게 죽은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외칩니다.

▲ 엠마오의 순례, 헨리 오사와 태너.(1905)

빵입니다. 빵 때문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빵이 그들의 죽은 삶을 살려 냈고 캄캄한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던 그들을 살아나게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빵을 성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생명의 빵인 성체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우리 안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신 예수님이,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와 살아갑니다.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이고 생생한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생명은 늘 살아 있음을 말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하느님이 주시는 이러한 영원한 생명에 의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변화되는 것,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우리 안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채워 나가는 것.

흔히 우리 삶을 광야로, 사막으로 비유합니다. 때로는 오아시스를 만나 목을 축이지만, 거칠고 메마른 광야를 걸어가는 여정으로 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해 만나를 먹으며 광야를 걸어갔듯이, 오늘 우리 또한 영원한 생명을 향하여 성체를 받아먹으며 삶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우리가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의 몸은 오늘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하느님의 생명으로, 영원한 삶으로, 그분과의 일치로 들어가게 하는 하느님의 크신 선물이자 은총의 은총입니다.
 

 
 
최성영 신부 (요셉)
서강대학교 교목사제
예수회 청년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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