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8월 9일(연중 제19주일) 요한 6,41-51; 1열왕 19,4-8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를 기록해서 남긴 공동체가 성찬에 대해 명상하던 내용입니다. 이 복음서는 6장을 시작하면서 먼저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서는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성찬이 지닌 의미를 예수님이 말씀하는 양식으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신앙인들에게 남은 것은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믿음과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모이면, 예수님이 최후만찬에서 남긴 유언에 따라, 성찬을 함께 거행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성찬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는 바를 더듬어 되살려 내어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성찬전례 전에 하는 말씀전례의 기원입니다. 그 과정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또 그리스도 신앙인의 삶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오늘 복음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함께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신”(탈출 16,4) 고사에서 가져온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1독서에서 호렙 산으로 향하는 엘리야 예언자를 하느님이 먹이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들을 먹이신다는 또 하나의 고사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이 베푸신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자유의 땅을 찾아 갈 수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이 베푸신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호렙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 곧 성찬으로 힘을 얻어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 자녀의 참다운 자유를 산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왜 수군거렸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수군거렸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그 말씀에 못마땅해 한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부모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이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머물지 않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듣고, 배우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을 넘어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 발견과 더불어 신앙인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하는 새로운 생명을 삽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일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삽니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중심이 된 초기 신앙인들은 함께 모여서 성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회상하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에 모신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신앙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새롭게 알게 되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먹고 영생을 누리리

오늘 복음은 또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발견하고, 그 하느님을 자기 삶의 중심으로 삼은 사람은 하느님의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도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에 참여하고, 그분의 몸이라는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죽지 않고 사는 것, 곧 장생불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신앙공동체가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죽음을 넘어서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은 인간관계입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어 그분의 인간관계를 자기 것으로 하는 사람은, 죽음을 넘어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듯이, 현재의 삶을 넘어서도 하느님 안에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미운 짓 말고 예쁜 짓도 보라는 뜻

우리는 모두 우리 자신을 아끼고,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재물과 권력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 합니다. 내 부모, 내 자식, 내 형제자매들은 소중하지만, 우리와 특별한 인연으로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을 우리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성찬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성찬에 참여하면서도, 우리 자신만 잘되도록 비는 마음이면, 정화수 떠 놓고 빌면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원하던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루카 6,27)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도 사랑하여 자기를 위한 공덕을 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에게 미운 짓을 한 사람도 그 미운 짓만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하느님은 지극히 작은 사람도 소중히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도 예수님을 대하듯이 소중히 대하는 사람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중심으로, 또 우리의 편의만 생각하며 살면, 우리 주변에 죽음이 발생합니다. 대자연도 훼손되어 죽고, 우리의 이웃도 외면당해 죽습니다. 대자연도 우리가 그것을 가꾸지 않고, 우리의 편의 위주로 마구 대하면 생명이 살지 못하는 죽음의 공간으로 변합니다. 물고기가 살지 못하는 강, 새들이 살지 못하는 하늘이 되고 맙니다. 바빠서 이웃을 바라볼 여유도 없는 우리의 마음에 이웃은 이미 지워졌습니다. 잘 있는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귀찮게 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된 새로운 삶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외롭고 가난하고 장애를 지닌, 이웃들을 정성껏 보살피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찬에서 빵을 예수님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보여 준 그 사랑을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있게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내 생명이 발산하는 것이 생명을 위한 것인지, 생명을 외면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하느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시면, 우리의 행보에도 사랑과 보살핌이 보일 것입니다. 부족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우리는 사랑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삽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