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9일자 2641호 <가톨릭신문>과 1012호 <평화신문>

▶ <가톨릭신문>의 편애

‘편애’란 단어의 사전풀이는 ‘어느 한 사람이나 한쪽만을 치우치게 사랑함’이다. 일간신문도 아닌 주간신문의 한정된 지면 안에 한국천주교회와 관련한 모든 것을 다뤄야 하는 교계신문으로서는 때로는 기사가 넘칠 때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이율배반이지만 소재 빈곤으로 고민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적절한 기사배치와 함께 교회내외의 다양한 인물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다분히 기술적이고 공평해야 한다.

3월 29일자 17면 출판 란에 [저자와의 만남]이 실렸다. 대상자는 <뿌리 깊은 희망>의 저자 차동엽신부다. 그를 소개한 기자는 기사 서두에 “그는 세상에 내놓은 책마다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어느덧 이름 석 자가 브랜드 가치를 지니게 됐고, 그의 책을 기다리는 고정 팬들도 생겨났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이의 없다. 하지만 작년 11월 23일자 [저자와의 만남]에서도 같은 기자는 “<통하는 기도> 낸 차동엽 신부”를 소개한 바 있다. 물론 그 때도 “이름 석 자 만으로도 독자들을 설레게 하는 작가가 있다”란 감탄사로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인천교구 차신부와 관련된 기사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소개되고 있다.

2007년 <가톨릭신문>을 검색한 결과다. 흥미로운 점은 그 분의 기사에는 거의 이름을 명시한다는 점이다. ‘차동엽신부, 무지개원리 강연회’(1월 1일), ‘차동엽신부, 저서 무지개원리 베스트셀러 지속’(3월 11일), ‘차동엽신부, 특별기고-도올에게 답한다’(4월 1일), ‘차동엽신부, 여기에 물이 있다 교육’(4월 15일), ‘차동엽신부, KBS 무지개원리 특강’(6월 19일), ‘KBS시사강좌에서 무지개 행복 붐 일으키는 차동엽신부’(6월 24일), ‘차동엽신부, 서울 교정 사목위에 저서 기증’(9월 23일) 등 7건이다.

이어지는 2008년 내용이다. ‘차동엽신부의 행복코드 1-2-3권(3월 9일)’, ‘(서평)밭에 묻힌 보물(4월 27일)’, ‘스마트 버전 무지개원리’(5월 25일), ‘차동엽신부 무지개원리, 태국 대만에 이어 영어판 출시(8월 3일), ‘차동엽신부와 떠나는 바오로 사도 전도지 순례-상(11월 9일)’ ‘순례-하(11월 16일)’, ‘통하는 기도 낸 차동엽신부’(11월 23일) 등 역시 7건이다. 2009년에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차동엽신부, 통하는 기도 하루 대피정(2월 8일)’, ‘차동엽신부가 말하는 추기경 이후’(3월 8일), ‘뿌리 깊은 희망 저자 차동엽신부’(3월 29일) 3월 현재 3건이니 올해도 그 분에 대한 사랑은 이어질 모양이다.

자신의 생각을 출판하고 강의하고 활동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박수를 보내드릴 일이다. 그러나 교계신문의 출판코너를 비롯하여 유별나게 특정인의 이름과 활동이 거듭해서 소개되는 것은 편애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더욱이 척박한 시장을 가지고 있는 교회출판물의 경우 두루두루 소개해 주는 것은 언론의 미덕이다. ‘되는 집 확실히 밀어주자’는 마음이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 <평화신문>의 무감각

‘무감각’이란 단어의 사전풀이는 ‘주변 상황이나 사람에 대하여 관심이 없음’이다. 아마도 세상사에 대하여 유난히 예리한 감각을 지닌 직업중의 하나가 언론을 직업으로 밥 먹는 사람들일 것이다. 직업병이 심하면 경찰관은 부부싸움 마무리도 조서작성을 하고, 신문쟁이는 뉴스거리 삼을 생각을 한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그만큼이나 언제나 치열하게 산다는 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때때로 주변상황에 대하여 ‘무감각’한 기사에는 아쉬움이 크다.

서울대교구장이며 유일한 추기경이 된 정진석추기경에게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그러다보니 정추기경으로서는 손님들을 맞으면서 적절한 인사말을 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에 없는 말을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적지 않은 나이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한국의 가장 큰 교구인 서울대교구의 업무보다도 훨씬 추기경을 힘들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기에 주위에서 보좌하는 사람들과 추기경의 동정을 보도하는 소임을 맡은 사람들은 추기경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신임 서울지방 경찰청장이 추기경을 찾아간 것을 <평화신문>은 3월 29일 19면에 ‘경찰의 노고에 감사 전해’로 보도하였다. 한마디로 부적절하고 무감각한 기사의 제목이다. 이 기사는 ‘정추기경, 신임 서울 경찰청장 예방 받아’란 무미건조한 제목이면 충분했다. 기사 내용대로 하자면 추기경은 찾아온 신임 서울경찰청장에게 지난달 김수환추기경 선종 때 보여준 경찰의 노고에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물론 서울경찰청장의 신임인사에 대하여 정추기경은 장례 때의 노고를 격려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면 족했다.

현재 우리나라 경찰에 대한, 특히 서울경찰들의 무서운(?) 활동과 빈틈없는(?) 역할에 대하여 교계신문 종사자들은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가? 서울시민과 많은 국민들은 경찰국가처럼 되어가는 작금의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다고 판단하는가? 주변 상황에 대하여 언론인의 감각으로 생각하여 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 내용을 차치하고 ‘경찰 노고에 감사 전해’란 제목을 뽑는 감각은 무감각인가, 초감각인가? 그것은 교회어른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닌 어렵게 만드는 일일뿐이다.

김유철/지금여기 편집위원, 경남민언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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