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8월 2일(연중 제18주일) 요한 6,24-35; 탈출 16,2-4.12-15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이 최후 만찬에서 쓰신 표현들을 사용했기에, 그것을 듣는 신앙공동체는 성찬을 연상합니다. 그 복음은 그 이야기에서 성찬의 의미를 깨닫도록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 복음에 이어서 기록된 부분입니다. 지난 주일 복음이 전한 기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영원히 살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사람들을 먹인 것은 그분이 주시는 양식이 있고, 그 양식으로 사는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을 믿고, 배우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보여 준 것은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그 서론에서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요한 1,12)고 이미 선포하였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찬에서 먹는 빵이 있고, 그것을 먹어서 발생하는 생명과 그 생명이 하는 실천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생명을 살게 하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말하면, 우리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초능력의 행사를 상상합니다. 사람의 힘을 능가하는 능력을 우리는 신통력이라 부릅니다. 뛰어난 재주를 가진 아동을 우리는 신동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일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생명을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는 하느님이 은혜롭게 주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하느님 앞에 처신을 잘하여 많은 혜택을 얻어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물 봉헌을 잘하는 처신입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마음에 들면 성은이 망극하게 혜택을 주지만, 괘씸하게 보면 벌을 주는 분이었습니다.

▲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예수, 비센테 후안 마십.(16세기)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그리스도인이 먹어서 생명을 얻는 빵은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은 하느님과 특수한 관계 안에 계십니다. 그 생명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같은 복음서는 이런 말씀도 전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요한 16,15) 우리가 예수님 안에 보는 것은 모두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성찬은 우리를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킵니다. 그래서 “결코 배고프지 않고....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찬은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이 아닙니다. 성찬은 우리를 기적적으로 변하게 하지 않습니다. 성찬은 우리의 자유와 상관없이,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성찬은 우리가 먹어서 힘을 얻는 빵입니다.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은 우리의 자유를 무시하고, 그것이 지닌 힘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쇠고기를 먹은 사람이 소의 힘을 발휘하지 아니하고, 돼지고기를 먹은 사람이 돼지의 삶을 실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은 사람은 예수님의 삶을 배웁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훈련합니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을 배부르게 해 주는 성찬이 아닙니다. 몸은 유대인들에게 인간관계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인간관계를 배워 자기 안에 실현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인간관계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측은히 여기셨다, 가엾이 여기셨다’는 말들은 복음서 안에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만나면 고쳐 주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을 만나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사랑이신 예수님의 인간관계를 우리도 살아서 하느님의 생명을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요한 15,9)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사람은 인간이 만드는 차별의 질서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높은 사람을 떠받들어 높이면서 비굴하게 처신하고, 낮은 사람을 순종하라고 짓밟으며 위세부리는 그런 차별의 질서 안에 살지 않습니다. 그 차별의 질서에서는 나에게 잘 한 사람에게 상주고, 부족한 사람에게 벌을 줍니다. 예수님은 그런 차별의 인간 질서를 떠나서,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를 다 하고 ‘쓸모없는 종이었다’(루카 17,10)고 말하면서 물러설 수 있는 성숙한 자유를 권장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당당하고 성숙한 사랑을 살 때, 가능한 일입니다. 생색도 내지 않고 보상도 바라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떤 시인(이경희)은 어머니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박수도 없이, 관객도 없이 혼신으로 지켜 온 당당한 인기.... 그 당당한 고독.”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은 그런 헌신과 고독이 있는 당당한 사랑입니다.

그 시대 경건하다는 이들은 그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도 차별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실천에는 인간에게 생명을 주고, 인간을 돌보아 주며 가엾이 여기는 하느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를 넘어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사랑의 생명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하는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배불리 먹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고, 주변의 생명을 자유롭게 섬기고, 그 섬김이 끝나면, 물러서는 당당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사랑입니다. 넓고 넓은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 사랑을 우리의 생명으로 삼아, 하느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는 성사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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