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7월 26일(연중 제17주일) 요한 6,1-15; 2열왕 4,42-4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호수 근방 어느 산등성이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요한 복음서는 복음서들 중 가장 늦게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의 저자는 이미 기록된 세 개의 복음서 안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들을 선택하여 순서를 정하고, 하나의 명상록으로 엮었습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기적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인가를 묻기 전에,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는 것인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복음서들은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 알리는 현대의 역사서가 아닙니다. 초기 신앙인들의 회상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 그리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던 바를 기록한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에는 초기 신앙공동체가 실천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시키는 표현들이 보입니다.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는 말로써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으로 하신 파스카, 곧 해방절 식사를 상기시킵니다. 그 식탁에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면서 그것을 당신의 몸,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 파스카를 언급하는 것은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연계하여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셨다’(요한 6,11)는 오늘 복음의 말은 예수님이 최후만찬 식탁에서 하신 일을 연상하게 합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들은 성찬의례를 하면서 그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오천 명을 먹인 오늘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시대 신앙공동체가 이미 하고 있던 성찬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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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제1독서로 엘리사 예언자에 관한 열왕기 하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를 발생시킨 공동체는 엘리사에 관한 그 고사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인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저자가 엘리사의 이야기도 참고했다는 말입니다. 열왕기의 엘리사는 보리 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였습니다. 엘리사 예언자는 빵 한 개로 다섯 명을 먹인 셈이지만, 예수님은 빵 한 개로 10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먹였다는 말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오늘의 이야기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엘리사 예언자를 훨씬 능가하는 분이라고 말하고자 합니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하느님이 그들을 먹이셨다고 말합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면서, 그들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땅에 와서 살도록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먹고 마시지 못할 때,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를 해방하지 못하는 곳을 하느님이 해방시키는 구원의 체험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엘리사 이야기에 보면,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빵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기에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두 이야기에서 모두 빵은 사람들의 눈에 형편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누었더니,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고도 남았습니다. 나누는 곳에 하느님의 축복이 있고, 나누는 곳에 풍요로움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숨결을 나누어 주셔서 인간 생명이 출현했다고 창세기는 말합니다. 우리도 가진 것을 나누어서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비록 우리 눈에 부족해도, 나누는 우리의 실천이 있으면, 그것은 하느님의 축복이 되고 풍요로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이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먹였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성찬 전례에 사용되는 표현을 쓴 것은, 성찬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말하려는 것입니다.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살던 사람이 성찬에서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 나눔에 참여하면서, 나눔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듣고, 지금까지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축복과 풍요로움을 자기 주변에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집착하여, 예수님을 왕으로 삼아, 먹거리를 해결하려는 군중을 예수님이  떠나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눔을 발생시킨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도, 지식도, 자격증도 모두 우리 자신을 가꾸고,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에게 조금 바쳐서 많은 것을 얻어낸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끊어 버리겠다고 약속한 유혹입니다. 유혹은 우리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게 하는 마음입니다. 세례 때, 우리는 예수님을 믿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준 나눔의 풍요로움을 살겠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그 약속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이 어떤 축복이며 어떤 풍요로움인지를 압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나눔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살라고 권합니다. 나눔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적입니다. 기적은 자연법이 설명하지 못하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 우리 눈에 놀랍게 보이는 것이 기적입니다.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오늘 존재한다는 사실도 성서에는 하느님이 하신 기적입니다. 모두가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 한 사람만 풍요롭게 살겠다고 노력하는 세상에, 이웃의 장애를 돕고,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이웃을 도우면서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풍요로움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을 보여 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성당 안에만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사의 대권을 쥐고, 우리를 위협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바친 만큼 받겠다는 우리의 약삭빠른 이해타산에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이 하셨듯이, 자기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는 사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이웃의 아픔에 참여하고,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 십자가를 지는 마음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내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서 이웃이 하느님의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데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우리가 나누어서 이웃이 축복과 풍요로움을 맛보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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