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자매로 산다는 것

3월이 되어 몇몇 자매가 다른 공동체로 떠나고, 또 몇몇이 새로 왔다. 가장 시급한 것은 공동체의 건설이다. 공동체는 단순히 “여러 명이 모여 같은 집에 사는” 것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를 따로 내어 회헌을 통하여 우리가 왜 여기 모여 이러고 사는지를 바라보고, 이 공동체를 어떤 모습으로 건설하고 싶은지도 나누었다.

서로간의 관계에 대한 나눔이 많았다. 각자 고유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피워내면서도 공동 사명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서로 격려하고 충고해주는, 한 마디로 ‘자매’가 되어 사는 삶을 원한다 하였다. 형제자매가 되는 것, 단순해 보이지만 쉽지가 않다는 것은 공동체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안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집은 저녁 식탁에서 되도록 느긋하게 앉아 있으려 한다. 식사야말로 다양한 사도직을 가진 자매들이 모두 모여 그날 있었던 일들을 나누고 쌓였던 긴장을 푸는 좋은 기회인 때문이다. 그런데 구성원이 다양하니 그중에는 말이 많아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도권을 쥐는 자매도 있고, 또 천성적으로 과묵해 잘해야 한두 마디로 끝내는 자매도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또 자매들이 자신에게 귀를 기울인다고 느끼고, 거기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말이 적은 자매에게 질문을 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도 다른 이에게 미뤄주는 등의, 은근한 배려가 필요하다. 형제자매가 되어 산다는 근사한 이상은 이렇게 조그만 배려들이 없다면 허상에 불과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수도생활뿐 아니라 모든 공동체를 건설하고, 건전하게 유지하는데도 같지 않을까 싶다.

예수님의 풀기 어려운 문제

당신 수난이 다가오자 예수님은 세 번의 수난 예고를 통해 작정을 하고서 제자들에게 특별 교육을 시키신다.(마르 8,31-35;9,30-35;10,32-45) 당신이 다니엘서에서 예언된, 마지막 때에 영광 중에 오실 그 “사람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힘과 권능으로 강요하거나 쟁취하는 구약의 방식과는 달리 박해와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왕권을 이룰 것이라고 예고하신다.

제자들이 이를 이해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예수님이 종말에 대해 언급하자마자, 제자들 마음에는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어난다. 그들은 다가올 왕국에서 누가 높은 사람이 될지, 누가 권력을 가지고 남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될 지를 두고 서로 다툰다. 그들은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첫째 자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그들은 열둘이나 되니, 분열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까이 불러 모으시고 정색을 하고 가르치신다. 어쩌면 이 가르침을 주려고 애당초 수난과 부활이라는, 제자들이 풀기엔 아직은 너무 어려운 문제를 제시하셨는지도 모른다.

무력하신 하느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35)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이다. 그분은 제자들을 새로운 공동체에서, 다른 이를 지배하고 그 위에 서려는 욕구를 포기하라고, 각자를 모든 이들의 종이 되라고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그분의 상징적인 몸짓으로 더 강조된다.

예수님은 한 아이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그를 껴안으신다. 우리도 그랬지만 유대교 문화권에서 아이는 순수함 보다는 무력함과 의존성의 상징이다. 그 문화권에서 어린이는,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한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어린이를 불러내어 공동체의 한 가운데에 자리를 내어주신다. 그리고 당신이 이 나약한 어린이와 같다고 하시고, 더 나아가 하느님과도 같다고 하신다.

실제로 곧 다가오는 수난에서 예수님은 점점 더 벌거벗겨지고, 작아지고, 배척받고, 마침내 죽임까지 당하실 것이다. 힘없어 당하는 어린이와 같이. 수난을 말하는 ‘Passion’이란 말은 수동적이라는 의미의 ‘Passive’와 어원이 같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회의 ‘어린이’를 껴안기 위하여 스스로도 ‘어린이’가 되셨던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이 하느님은 정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그런 하느님이 아니다. 그분은 십자가 사건에 개입하여 이 불의를 단번에 해결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신다. 구약에 나타나는 권능의 하느님은 이제 십자가에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아버지로 계시되신다. 그분은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리실 때 침묵으로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신다.

우리를 위한답시고 강제로 마음의 문을 열게 하지 않고, 오히려 당신 아들까지 우리 처분에 내어맡기신다. 이런 식으로 힘이, 권력이 행사될 때, 거기에 생명이 태어난다. 이렇게 하느님의 본질은, 그 영원한 힘은 당신 생명을 나누어주는 행위로, 그리고 그 생명을 선물로서 받아들이는 이들과 사랑의 친교를 나눔으로써 드러난다. 사랑의 친교-, 이것이 공동체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공동체-사랑의 친교

공동체는 그 ‘무리’ 중의 어린이를 중심 자리에 둘 때 가능하다. 어린이에게 자리를 내어주기 위하여 그 구성원들이 조금씩 자기 자리를 옮기고 자세를 바꿀 때, 살아나는 것은 어린이만이 아니다. 거기에 서로 형제자매가 되어 생활하는 공동체가 탄생한다. 이는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그 공동체가 성숙하고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인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는 누구일까? 이주민들? 철거민들? 환경? 무한 경쟁 속으로 내몰리는 어린이, 학생들? 계약직 노동자들?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다. 어디를 보아도 가진 자, 힘있는 자들이 사회의 중심에 있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점점 더 구석으로 구석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이 멀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라기보다 우리 사회의 힘없는 이들, 즉 어린이들을 대하고 있는 방식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힘이 센 사람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자기 권리를 다 누리고 사는 것이 정당하다고, 그것이 부러우면 힘이 세어지라, 위로 올라가라, 더 가지라고 부추기고 있다. 지난 이삼십 년간 이러한 사고방식에 너무나 길들여져서 이런 가치들이 얼마나 반복음적인 지를 꿰뚫어볼 힘조차 없어진 것일까? 하긴 이천년 전 제자들의 공동체에도 같은 면이 있었으니, 그게 한편으로 위안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그랬듯 오늘날 사회를 향해서도 예수님은 어린이를 한 가운데로 불러내어 세우시고 그를 부드럽게 안아주실 것이다. 그분과 함께, 나의 약함을, 내 가족이나 공동체, 사회의 약자들을 한가운데로 불러내고, 부드럽게 안아주려면 어디서부터 첫 걸음을 떼어놓아야 하는 것일까?

어린이-십자가의 또 다른 상징

사람은 힘에 대한 욕구를 포기한 다음에야 사랑을 시작하고, 다른 이와 형제자매가 되어 살아갈 수 있다. 첫째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첫 자리를 차지해서가 아니라 마지막이 되고 종이 됨으로써 그 존재 깊이에서부터 사랑할 능력, 아름다움과 선함을 경탄하고 다른 이를 껴안을 능력이 솟아난다.

어린이, 십자가의 또 다른 상징! 이렇게 공동체의 한 가운데에 세움으로써 자연적으로는 마지막인 그 어린이는 모든 이의 “첫째”가 된다. 왕국에서 예수님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신다. 지배하는 이가 아니라, 어린이로서 첫째가 되신다. 그러기에 다가올 수난 중에 그분은 어린이와 같이 작아지고 무력해질 것이다. 수난은 이렇게 사랑의 가장 빛나는 표지이자 사탄적인 모든 힘, 우리 각자에 대해 힘을 행사하는 모든 외적인 권력을 완전히 뒤집는 참된 사랑의 표지가 된다.

홍현정/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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