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 신부] 7월 19일 (연중 제16주일) 마르 6,30-34; 예레 23,1-6

가끔 신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믿는 우리들은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제인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무작정 가졌던 첫 마음부터 시작하여 신학생 시절을 거치고 사제가 되어 지금까지 살면서 내 자신과 신자들에게 자주 물어보곤 했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고민은 질문이며 동시에 신앙인의 신원을 밝혀 주는 가치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끊임없이 하느님 앞에서 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외딴 곳에 가서 좀 쉬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의 파견과 귀환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런 의미로 들립니다.

믿음은 삶으로 살아낼 때 본연의 가치를 지닙니다. 야고보 서간에서는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 말하며 주님께 대한 믿음이 온 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임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자신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믿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증거 할 때, 그 믿음은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 2014년 12월 서울대교구의 유경촌 주교와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 정수용 신부가 고공농성 중인 해고자에게 생필품과 노사목 위원들이 쓴 손편지를 전달했다.ⓒ공동취재단

실천이 믿음을 보여 주는 것

삶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죽은 믿음은 더 이상 참다운 믿음이나 올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삶을 통해 내가 지금 믿고 따르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믿는 분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고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같은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른 이유는 자신이 믿는 분이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물음은 신앙이란 이름으로 행하는 삶의 원천이 무엇이냐 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의 존엄을 외치는 것을 인본주의라 하고, 공동선을 찾는 것은 정의사회 실현이라 하며, 상호 보완을 해 나가는 것을 상생의 질서라 하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함께 나아가는 것을 연대라고 합니다. 존엄성, 정의, 공동선, 보조성의 원리, 연대 등은 사회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항상 정치적으로 다가오는 문제들입니다. 즉, 믿음을 가진 이들만 직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일상적 삶입니다. 이 시대, 이 세상, 좁게는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맞닥뜨리는 생활입니다.

일상적으로 부딪히는 삶의 문제에서 믿는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다르고, 무엇이 달라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신앙인의 신원이 결정되고, 내가 믿는 이가 누구인지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신앙의 이름으로 하는가?.... 예수님과 친교 때문

세상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의 원천은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님과의 친교입니다. 거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모든 일상과 외침과 증거는 사회운동을 하는 이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투신하는 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앙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굳이 신앙을 가지고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창조질서를 되찾기 위한 신앙적 투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름을 통해 초대교회는 세상에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밝혔고, 복음화의 보편 가치들을 실현해 나갔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그 다름의 원리를 몇 가지로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인간의 존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주어진 것이다. 공동선을 지향하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성, 일치, 평등에서 모든 인간과 전 인간의 선을 그 으뜸 목표로 삼아야 한다. 섬김을 받으려는 이는 섬기는 이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보조성의 원리는 모든 상위 질서가 하위 질서의 사회에 대하여 지원과 증진과 발전의 자세를 갖추어 인간 존엄성의 신장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사회 원리이며 도덕적 덕목인 연대성은 상호 의존과 유대를 확고하게 하여 전적인 무상성, 용서, 화해와 같은 그리스도교 적인 차원을 지닌다.’(간추린 사회교리 참조) 사회교리는 근원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신앙인의 삶이 하느님의 친교에서 비롯되고 하느님과의 친교로 귀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삶과 사회의 쇄신과 변화를 위한 신앙생활은 그 자체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의 증거가 됩니다.

고공에서, 거리에서, 재개발 현장에서, 농촌에서, 광화문광장 등 전국 곳곳에서 시대의 고통에 하느님의 손길을 청하는 간절한 기도와 미사가 봉헌되고 있습니다. 그 현장은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가끔씩 미사와 기도에 동참할 때면 내 자신에게 매번 질문을 합니다.

거리로 나서 욕을 먹으며 미사를 봉헌하고, 아슬아슬한 굴뚝과 광고판 위의 고공을 아픈 눈으로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하고, 바벨탑을 연상케 하는 재개발 현장과 이질감을 가지고 지나치는 무리가 가득한 광화문광장에서 서로 손을 잡고 노래하고 기도하고 미사에 함께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신앙인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독재와 불의로 인한 아픔과 고통의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믿지 않는 이들과 나는 무엇이 다른지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다릅니까?
 

 
 

 박명기 신부(다미아노)
 의정부교구 청소년 사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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