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留皮 人死留名) 호랑이에게는 가죽이라면 사람에게는 이름이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이 훌륭한 일을 해서 후세에 좋은 이름을 남기라는 교훈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름’ 보다는 ‘훌륭한 일’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자신이 지나간 자리에 ‘선을 향한 문화’를 남기는 것. 이름은 잊히더라도 그 사람의 흔적이 문화로 남아 좋은 영향을 준다면 그것이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문화라고 해서 꼭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 문화, 분리수거를 잘 하는 문화,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문화.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할 수 있는 문화.

이처럼 정의와 평화에 조금이라도 더 부합하는 데 이바지 하는 크고 작은 ‘집단의 습관’이 모두 선을 향한 문화다. 내가 행하는 공동체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이런 크고 작은 문화로 자연스럽게 흔적이 남는다. 개인의 입신양명이라 할 수 있는 단순한 ‘이름 남기기’에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가치다.

그래서 묻고 싶다. 국회법 개정과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로 시끌벅적한 요즘. 선출직 국회의원과 행정 관료들에게, 그리고 대통령에게. 지금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소위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특히 더 이러한 문화 남기기에 사명감을 지녀야 한다. 법이라는, 공권력으로서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2주간 저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저는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습니다.”

유승민 의원이 어떤 사람이고 지금껏 어떤 정치행보를 걸어왔는지를 떠나서, 원내대표 사퇴 기자회견에서 그가 한 말은 그야말로 문화 남기기의 신념을 보여 준다. 고개를 들고 당당히 이름이 아니라 문화를 바라봤다고 말할 수 있는 정치인이 현재 몇이나 될까. 아직은 이상(理想)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청년의 눈이었기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번 일을 디딤돌 삼아 나아가려면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정치인이 그들의 목표는 재선이라는 현실적 공식에 굴복하지 않고 더 원대한 이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행할 수 있는가. 그런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지금 우리가 바라봐야 할 곳은 어디가 돼야 하는가.

제왕적 대통령제는 다원화된 민주사회에 설 땅이 없다

세 발 솥(鼎). 제사에 올리는 고기를 끓이는 데 쓰인 청동기로, 중국 고대 권력의 상징이다. (사진 출처 = zh.wikipedia.org)
국회법 개정의 핵심은 행정부 시행령이 그보다 상위법인 국회법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한 공무원 연금개혁안과 세월호특별법이 대통령 시행령에 의해 사실상 유명무실 된 것이 큰 계기가 되었지만, 국회법 개정에 대한 논의는 그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더 큰 그림을 보자면, 역사와 문화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정상 궤도로 돌리려는 입법부의 노력이 있었다. 제왕적 대통령제란 3권 분립이 필요조건인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한이 다른 정부기관에 비해 막강해 흡사 제왕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한국 제도상 대통령에게 지나친 권력이 집중되었다는 것은 이념을 떠나 틀림없는 사실이다. 특히 대통령에게 법률안 발의권과 법률안 거부권이 모두 있다는 것은, 입법부의 고유 권한을 행정부가 침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도가 가능했던 요인은 남북분단의 상황이 권력집중에 설득력을 주었고, 빠른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가 발전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대통령직을 군주 문화화하는 유교의 전통이 문화적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왕적 대통령제가 과거의 산물이기에 이제는 현재와 더 나아가서는 미래를 바라보고 그에 적합한 정치 제도를 다져나가야 한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한 사람에게 제왕적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목소리가 다수에, 혹은 권력에 짓밟히지 않으려면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들은 다양한 이익을 대변해야 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유의미할 수 있도록 자신의 소명을, 입법부 일원으로서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행해야 한다. 또 그것을 행정부와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함께 그려나가야 할 공동의 목표로 설정하고, 자유, 민주라는 가치에 맞는 문화를 계속 만들어나감으로써 정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지 말 것

그렇기에,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통령의 엄포에 굴복한 여당은 입법부 일원으로서의, 선출직 공무원으로서의 소명을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재선이라는, 권력의 유지라는 ‘단순한 이름 남기기’ 임을 확인했다. 유승민 의원이 패자가 됨으로써 권력 유지를 위해 소명은 버려야 한다는 나쁜 문화가 덧칠됐다. 이쯤 되면 그들을 손으로 뽑은 우리 국민들 역시 성찰이 필요할 때다. 다행히도 제왕적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민의 투표권은 여전히 유효하지 않은가. 이 문화를 현실이라 말하는 것은, 선의 문화를 남기려는 이들을 지나치게 이상적인 자들이라 일컫는 것은 비겁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삶의 곳곳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듯, 우리 사회에 선의 문화를 남기려는 마음 또한 본능이라고 믿는다. 때론 그 본능을 거스를 만큼 현실의 벽이 높고 이미 쌓인 나쁜 문화의 악취가 코를 찌르지만, 사람은 죽어 문화를 남겨야 한다. 호랑이 가죽은 쓸모라도 있지, 속은 텅 빈 이름만 남길 것이라면 호랑이보다 나은 게 무엇인가?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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