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한상봉] 농민주일을 기다리며

지금은 글을 쓸 때 언제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이라고 붙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농부, 평신도신학자’ 이렇게 꼬리를 달았던 적이 있다. 언감생심, 입으로 노래하던 농사를 짓기 시작한 1999년부터다. 30대 후반의 아직 청년이 티가 무덕무덕 오르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뭘 모르고 붙인 ‘업’(業)이 농부였다. 농사는 관념이 아니었고, 구체적인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노동이었다. 그 노동으로 살아 있는 입에 내 손으로 먹을 것을 넣어 준다는 희망이다. 그래서 신학보다 귀하고 종교보다 거룩하다. 그래서 서둘러 6년 만에 탈농한 이후에도 지금껏 다시 그곳에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다. 내 근력이 닿는 데까지, 내 영혼이 깊어지는 만큼 농사를 짓고 싶은 것이다.

당시 나는 귀농을 ‘내 영혼의 IMF’라고 불렀다. 내 생활을 전면적으로 구조조정해야 한다는 절박감 때문이었다. <공동선>이라는 격월간 잡지 일을 하다가 몸에 병을 얻고, 마음에 허기가 들어 달려갔던 전라도 무주 산골짜기였다. 그 당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던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톨스토이와 유영모 선생이다.

톨스토이, 귀농을 위한 카피레프트

▲ 톨스토이
내 나이 지금 53살. 레흐 톨스토이(1828-1910)도 쉰 줄에 들어서야 인생의 깊은 전환기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미 러시아의 대문호로 인정받고, 상속받은 장원과 수없이 입금되는 인세를 관리하던 톨스토이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이 소유한 1만 6000에이커의 땅과 300마리의 말이 도대체 자신의 인생에 어떤 해답을 주고 있는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설사 고골, 푸시킨, 셰익스피어, 몰리에르와 같은 대문호와 어깨를 겨루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손 치더라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재산도 명예도 예술도 가정도 일시적이라면 사람이란 과연 궁극적으로 무엇을 손에 들어야 하는가?

1878년, 오십대가 된 톨스토이는 본래 3부작으로 구상되었던 “전쟁과 평화” 1권을 끝내고, 속편이 될 “데카브리스트 사건”을 쓰기 위해 자료를 구하던 중 차르 정부의 문서 자료 열람 거절로 집필 작업이 좌절을 겪고 나서야 궁극적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가 볼 때, 부유하고 교양 있다는 자들은 재산과 권세, 쾌락을 탐닉하며 “무덤 위에서 허무한 춤을 추는 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만나고 수도원을 찾아가 보았지만, 법의(法依)를 몸에 두른 자들이나 고위 성직자일수록 진실한 신앙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말은 번질번질하지만 속내는 복음과 딴판으로 보였다. 그는 진실을 농민들에게서 발견했다.

“나는 가난하고 학문이 없는 사람들과 만나 보았다. 그런데 상류층에겐 빈껍데기뿐이었던 신앙이 그들에겐 생활 속에서 실증되고 있었다. 신앙은 그들에게 힘과 위안을 주었다. 신앙으로 일상에서 부딪치는 고난을 극복하고 맨 나중 문제라고 해야 할 죽음마저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가슴에 끌어안는다.... 그들의 생활 태도에서 새삼스럽게 감명을 받았을 때 비로소 나는 번민이 차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다.”(“참회”,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돈 강 유역에 살던 테모페이 본다료프(1820-1898)라는 농부였다. 그는 “그대 이마에서 땀을 흘려야 그대의 빵을 얻으리라”라는 성서 말씀을 제 경험에 견주어 가며 “근면과 무위도식―농민의 승리”라는 책을 썼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시킨 일을 요약하면 두 가지다. 즉 남자는 땀을 흘려 빵을 생산하고, 여자는 고통을 치러 아기를 낳으라는 것이다. 여자가 맡은 일은 변동이 없었다. 황후도 아기를 낳으려면 고통을 치러야 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하는 일에는 불합리한 변화가 생겼다. 일하는 자와 일하지 않는 자로 나누어졌으며, 모든 일 중에 가장 근본적인 일에 해당하는 농업을 오히려 멸시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돈으로 빵을 산다. 돈만 있으면 된다. 그 결과, 하느님이 당부한 일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쓰게 되었다. 들판의 짐승이나 하늘을 나는 새나 물 속의 고기들이나 하느님이 시킨 대로 살고 있는데, 교육받고 지식이 있다는 인간만이 사명을 회피하고 있다.... 노동을 외면하고 입으로만 떠드는 사랑의 설교는 위선이나 다름없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짚신을 신고 매일매일 호미를 손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의무가 생활의 중심이자 사회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말’을 중지했을 때 ‘사상’(思想)도 중단되는 걸 느꼈다. 그러나 본다료프 같은 농부들에게서 침묵 속에서 더욱 빛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톨스토이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쓰레기를 나르거나 뒷간 청소를 하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요 동포에게 그것들을 나르도록 뒷간통 쓰레기통을 채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다. 허름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고 신발 없는 이들의 옆을 고급 구두를 신고 지나가는 것이 부끄럼이다. 외국이나 최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빵을 만들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다”라고 고백했다. “더럽혀진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자, 톨스토이는 귀농을 결심한다.

톨스토이는 집과 정원의 일부만 남겨 두고 물려받은 땅을 모조리 농민들에게 거저 나눠 주는 일부터 했다. 물론 농민들이 십 년 안에 그 땅을 팔아 치우지 않는다는 약조를 받고서 말이다. 그동안 지은 소설에 대한 판권도 포기했다. 러시아 사람들뿐 아니라 전 세계 인민 누구나 자유롭게 톨스토이가 쓴 책을 공짜로 출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카피레프트(Copyleft)를 선언한 것이다.

유영모: 신앙같은 노동으로 천명을 기다린다

한편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가 농사로 돌아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공교롭게도 톨스토이였다고 한다. 유영모는 농사짓기를 소원했는데, 사는 방편으로가 아니라 사는 보람에서였다. 그는 경성피혁 상점 일을 볼 때나, 경성제면소를 운영할 때도 마음은 언제나 농촌에 가 있었다. 사람이라면, 적어도 제 먹을거리는 제가 마련해야 한다고 여겼다. 처음 유영모가 귀농을 생각하면서 수첩에 적어 놓은 것은 톨스토이의 ‘생활 십계명’이었다.

1. 밤이나 낮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신다.
2. 매일 실외에서 운동한다.
3. 음식을 절제한다.
4. 냉수욕을 한다.
5. 넓고 가벼운 옷을 입는다.
6. 청결에 힘쓴다.
7. 규율에 맞추어 일한다.
8. 밤에는 반드시 푹 잔다.
9. 이웃에 착한 마음을 쓴다.
10. 볕 잘 드는 넓은 집에서 산다.

▲ 다석 유영모
유영모는 간절한 향농심, 귀농심으로 농우를 사모하고 농부를 경애하였다. “무식하고 가난하고 고생하는 동포, 그들 가운데 하느님의 종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울 구경 한 번 못한 촌뜨기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예수가 섞여 있습니까? 농민 노동자들, 이들은 모두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 특히 무식한 어머니들은 우리들의 더러움을 대신 지는 성모입니다. 그들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이요, 그들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귀농을 반대하던 부친이 돌아가시고 삼 년 뒤에 유영모는 마흔 다섯의 나이에 농촌으로 귀거래했다. 그가 서울에서 출애굽하여 정하고 찾아간 곳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산마루에 있는 비봉산 아래였다. 당시 행정 구역상으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 150번지. 구기리 골짜기는 인근에 십여 호가 사는 한적한 곳으로, 여기에 임야 다섯 필지를 사서 지냈다. 이때에 얻은 별호가 북한산인, 비봉거사였다. 평지가 없어서 논농사는 짓지 못하고, 자두, 복숭아, 감, 산능금, 앵두 등 과일 나무를 심었다. 고구마, 토마토, 감자, 고추, 무, 배추 등 채소도 가꾸었다. 그 밖에 닭과 토끼, 돼지와 젖소도 키웠다. 이른바 복합 영농인 셈이다. 이렇게 유영모는 톨스토이의 생활 십계를 다 지키게 되었다.

이처럼 유영모에게 농사는 신앙과 같았다. 흔히 부모들이 자신은 고생하더라도 자식만은 농사꾼 만들지 않으려고 한다지만, 유영모는 아들도 공부보다는 농사를 짓기 바랐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제 자식 삼형제에게 일부러 대학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는데, 그 마음이 같은 것이다. 자식들 스스로 힘써 노동하고 살아야지, 남을 부리는 지배층이 되는 것을 미리 막아 보자는 뜻이다. 힘써 노동하지 않고도 잘 사는 귀족이 되면 참 생명인 영혼이 죽는다고 믿었다. 또한 농사를 짓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고 천명을 기다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영모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농사꾼뿐이라고 생각했다. 농부는 때를 기다리고 때를 지켜 제 할 일을 마무리한다. 그것이 사명이다. 씨 뿌릴 때 씨를 뿌리고, 거둘 때 거둔다. 그러니 농부들에겐 따로 하느님을 전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다. 이미 그 나라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도 내가 심었으니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내가 거두었으니 내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하느님과 자연이 돕지 않으면 허사가 되는 게 농사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기리고, 햇빛과 물과 공기에 대한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농사는 결국 마음밭을 갈기 위함이라고 믿었다. 농사는 열매와 낟알을 거두고자 함이요, “열매와 낟알을 거둠은 시간을 얻고자 함이다. 시간을 얻음은 학문을 닦기 위함이다. 학문을 닦음은 진리를 깨닫자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자는 것은 참 아버지를 찾아 돌아가자는 것이다. 여기에까지 이르러야 참 농사다.” 마음밭[心田]을 갈기 위해 농사에 전념하면서 유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일할 때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은 면류관보다 아름답고,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은 금강석보다 값지다. 명상이 마음의 기도라면, 노동은 몸의 기도다. 피땀을 흘리면서 일하는 것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이다. 하루 온 날의 힘씀으로 술에 취한 듯 노곤한 몸으로 저녁의 노을을 등지고 저 높은 곳에 계신 영원한 임 앞에 머리 숙일 때 하루의 삶이 온전히 큰 님 앞에 바쳐진 듯 기쁨이 넘친다. 너도나도 밀레가 그린 ‘만종’의 살아 있는 그림이다. 피곤할 때 드리는 기도에는 잡념이 일지 않는다. 가장 거룩한 기도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는 차서 넘치고 시골은 텅텅 비어 간다. 예수는 기도하러 골방에 들어가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기도하러 빈 시골에 가야 한다. 서로 치이고 밟혀 못 살게 된 도시를 떠나 호연지기 가득 찬 시골로 가서 살아야 한다.”

사막의 영성가인 카를로 카레토 수사는 ‘도시 속의 광야’를 찾아가라고 권했다. 번잡한 삶의 한가운데서도 기도할만한 은밀한 장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광야를 찾으라는 말이다. 지금도 관상수도자들이나 정주 수도원에서는 기도만큼이나 ‘노동’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기도가 대지에 뿌리박은 노동을 통해서 보람을 얻도록 요청했다. 굳이 우주심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농업 노동은 하느님의 육신과 접촉하는 거룩한 과업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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