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칼럼]

7월 8일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마침내 사퇴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유승민 대표를 “자기 이익만 챙기는 배신자”라고 낙인찍는 폭탄발언을 하고 이에 호응한 친박(친 박근혜) 의원들이 유 원내대표에게 사퇴 압력을 가하기 시작한 지 13일만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 의원들이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압박한 명분은 그가 야당 및 비박(非朴)의원들과 함께 대통령이 반대하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 “배신자”이며 이런 행동은 국회가 행정부의 입법에 개입하는 것을 허용해서, 3권분립 원칙을 어기는 위헌행위로 행정부의 활동을 마비시키는 행동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공법학자의 82퍼센트가 국회가 제정한 모법에 위반되는 하위법(시행령)의 시정을 요구하는 것은 합법이며 위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여론조사가 유 원내대표의 행동이 배신정치라는 대통령과 친박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도 친박은 상반된 주장에서 대통령이 물러설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비논리적인 억지 주장을 고집하며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유승민에게 동조적이던 김무성 당대표마저 대통령이 물러설 수는 없지 않느냐는 주장에 넘어갔다.

▲ 유승민 의원.(사진 제공 = 유승민 의원실)
유승민은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지명한 자가 아니고 국회의원들이 선출한 국회 대표이기 때문에 의원총회에서 사퇴를 결정하지 않는 한 사퇴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래서 8일 긴급의총이 소집됐는데 8개월 뒤에 있을 총선에 정치생명을 건 국회의원들은 3시간 50분 동안 격론을 벌인 끝에 투표 대신 박수로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권고”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김무성 당대표로부터 의총 결과를 통보받은 유승민은 사퇴를 결정하고 의미심장한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박근혜 정권의 국회는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이며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유신시대의 유정회(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 의원이고 당대표는 대통령이 지명하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민주주의 파산선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배신자” 유승민을 원내대표 자리에서 “찍어 내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유 원내대표의 사퇴는 정상적인 민주국가에서 상상할 수 없는 하나의 가면극이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가려져 있던 박근혜 정권의 민낯과 한국 민주주의의 정체를 온 천하에 드러냈다.

그래서 경향신문은 9일 “박근혜 정권의 본질 드러낸 유승민 사퇴”란 제목의 사설에서 “집권 여당은 이제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행사를 정당화하는 하부기관으로 전락했다. 헌법 가치는 훼손되고 정당정치, 민주주의는 모독당했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수십 년 전 권위주의 시대로 후퇴했다”고 개탄했다.

한겨레신문도 같은 날 박근혜식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라는 사설을 싣고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는 “형식은 자진 사퇴지만 사실상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정치적으로 숙청한 모양새다. 이렇게 우리 정치는 1970-80년대 대통령이 당(黨)총재를 겸하며 당을 좌지우지하던 권위주의 시절로 후퇴해 버렸다. 아무리 사회 각 분야에서 퇴행과 반동이 일상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수십 년간 조금씩 전진해 온 정당 민주주의가 한 순간에 군사독재시대로 되돌려질 수 있을까 놀랄 따름이다”라고 “박근혜식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흥미로운 것은 친박 신문의 대표로 간주되는 조선일보가 유승민의 사퇴에 관해 사설을 싣지 않고 사회평론가 언론인 조우석의 시론 “유승민은 여의도 야합(野合)정치의 몸통이다”로 유승민의 행동을 비판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유신시절에도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설 대신 외부 필자의 글을 통해 자사의 의견을 대신하는 수법을 사용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욕 먹을 수 있는 의견을 외부 필자에게 의뢰함으로써 손 안대고 코 푸는 일종의 꼼수였다. 중앙은 “유승민 사퇴.... 그만 싸우고 국정 정상화에 올인하라”라는 제목의 사설로 양쪽을 다 같이 비판하는 중립적(?) 사설을 실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행동을 비판하지 않은 몰가치적 행동을 중립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동아는 유승민의 사퇴 선언문에 포함된 긍정적 의미를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어 종전의 동아와는 좀 달라지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게 했다. 그러나 한겨레나 경향처럼 박근혜 정권의 반민주적 행동에 대한 예리한 비판은 없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8일 사퇴했다. 그러나 원내대표 사퇴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중단하지 않겠다는 의지까지 “중단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의 사퇴 성명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 꿈을 일깨워 주는 희망의 망령이 될 것 같다. 핵심 내용을 소개하면

오늘 아침 여의도에 오는 길에, 지난 16년간 매일 스스로에게 묻던 질문을 또 했습니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정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열린 가슴으로 숭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진흙에서 연꽃을 피우듯, 아무리 욕을 먹어도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정치라는 신념 하나로 저는 정치를 해 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저의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오늘이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 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2주간 저의 미련한 고집이 법과 원칙 정의를 구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저는 그 어떤 비난도 달게 받겠습니다. 거듭 국민 여러분과 당원 동지 여러분의 용서와 이해를 구합니다.

지난 2월 당의 변화와 혁신, 그리고 총선 승리를 약속드리고 원내대표가 됐으나 저의 부족함으로 그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난 4월 국회연설에서 “고통받는 국민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 제가 꿈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원내대표가 아니어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습니다.

저의 꿈을 같이 꾸고 뜻을 같이 해 주신 국민들, 당원 동지들, 그리고 선배 동료 의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기자회견 성명에 대해서 친박에서는 “그러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는 말이냐? 박 대통령을 왕조대의 비민주적 절대군주란 말이냐” 하고 불평했다. 그들은 질문으로 이미 답을 얻은 것 같다.
 


 
 

장행훈(바오로)
파리 제1대학 정치학 박사,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초대 신문발전위원장, 현 언론광장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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