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영 로사(49세); 예술심리치료사

어제도 그렇더니 오늘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혜화동으로 가야한다. 이원영 선배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릴 것이다. 오늘 혜화동에서 어느 신부님과 약속이 잡혀 있어서 내친 김에 그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참에 보자고. 사람들은 버릇처럼 “언제 한번 봐요!”하고 말을 건네지만 그 말을 곧이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저 인사치레거니 생각한다. 실상 먹고 사는 게 바쁘다 보니, 눈앞에 보이는 일이 급하다 보니, 하나의 일감을 놓으면 다른 일감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도시생활이다. 그러니, 우린 다짐해야 한다. 내친 김에 뭐든 해야 한다고, 생각날 때 전화하고, 떠오를 때 안부를 전하자고. 그리고 오늘처럼 기회가 닿을 때는 무조건 만나야 한다. 내일이란 아마도 우리 사이에 없을 것이기에.

성당에서 출가(出家)했다고나 할까

혜화동 로타리 근처 그이의 미술치료실이 있는 건물에 ‘엘빈’이라는 카페가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의 근황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얼마 전에 가톨릭대학생회의 피정에 다녀왔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나자로 마을에서 치러진 피정에서 아마도 예술치료 관련 세션을 하였을 터였다. 그이는 ‘로사’라는 세례명을 달고 있지만, 요즘은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그이의 표현을 빌리면, 성당에서 출가(出家)했다고나 할까? 그러다 문득 착한 신자들의 “믿습니다!”하는 분위기에 잠깐 머물다 보니, 자신이 참 친숙했던 자리에서 많이 떠나 왔구나, 하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냥 그런 곳에 주저앉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도 솟아올랐다. 그러나 밤 1시에 그네들과 작별하고 나자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곳은 다시금 쉽게 되돌아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이에게 신앙이란 고향처럼 친숙하지만 충분치 않은, 밖에서 더 찾아 헤매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막연함 뒤에 남는 것이었다.

그이는 이미 가톨릭에서 떠나 있었고, 그 길에서 만난 것이 예술치료다. 지금 예술치료 분야에선 뭔가 발이 땅에 닿고 있다는 느낌이 오는데, 신앙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더욱 막연한 것으로 남아 있다. 신앙이란 익숙할 뿐 몸에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다들 행복한데, 난 왜 이럴까,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가톨릭신앙을 떠나면 죽음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다른 마을에서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있는 것이다. 떠나온 것은 슬프지만, 다른 한 구석에서 비교적 안전하게 지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이는 말했다.
.
수면 위에 떠 있는 가랑잎처럼 보낸 세월, 그리고

 

이원영 선배의 미술치유 작업실, 비좁은 공간에서도
조용히 상처가 아물고 다스려진다.

서울미대 조소과를 다닐 때에는 사회정의에 대한 엄정한 의식이 있어서라기보다 어쩌다 보니, 뭔가에 끌린 듯이 탈춤반에 들어갔고, 가톨릭대학생회 활동도 하였는데, 모두가 시국 문제에 대하여 열렬한 사람들이 모였던 것 같다. 그이는 야학도 하면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지만 그 혼란을 주워 담을 겨를이 없었으리라. 졸업한 뒤에는 결혼하고 애 놓고 하면서, 수면 위에 떠 있는 가랑잎처럼 무기력하게 지냈다. 가족 안에서 주어진 역할에 적응해 갈수록 따라 들어온 것은 우울증 같은 것이었다. 뭔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 그리고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이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스포츠 댄스, 라틴댄스, 룸바, 차차차, 탱고, 살사까지 미친 듯이 춤을 따라가면서 발견한 것은 ‘내 몸’이었다. 정신이 몸 안에 거(居)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제야 내 몸이 ‘나 살아 있어’하고 말을 건네는 듯하였다.

그 즈음에 미술치료를 손대기 시작했다. “아마 어떤 물살을 탔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그이는 말한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가족 안에, 어쩜 자기 자신 안에만 꼭 잠겨 있었던 그이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이는 내담자로 만난 사람들은 신내동 꽃동네 마을의 버려진 노인들, 자폐아들이다. 그들을 보면서 “스스로 늙어가지 않고 자폐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 자신이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도 나이 먹고 자기 안에 갇혀 지낸 세월이 길었다. 그래서 많이 아팠다. 나와 상관없이 지나온 세월이 아쉽고, 그 사람들의 아픔이 그이의 가슴에 고여 있던 아픔을 건드렸다.

사람들의 아픔이 그이의 가슴에 고여 있던 아픔을 건드렸다

그이는 지금 <예술치유 시민네트워크 ‘깸’>이라는 치료실을 열고 버려진 아이들과 재소자들을 만난다.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생생함을 찾고 있다. 그이의 말을 빌리자면, 삶이 생생하지 못하면 죽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 죽어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숨죽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작업을 통해서, 그들의 생명이 느껴지면서 그이의 생명도 더불어 움직이고 공감적으로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건물 모퉁이 아주 작은 철문을 열면 그이의 치료실이다. 좁은 방 사위에 미술재료가 쌓여 있어서 마치 창고에 들어온 느낌이다. 그이는 부스럭거리더니 귤 두어 개를 탁자에 꺼내놓고 앉아서 말했다. “세상이 너무 슬픈 게 아름다워. 너무 아름다운 것은 슬프고. 너무 환하고 눈부신 것들은 슬프지.” 그러나 지금은 슬픔보다 아름다움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마음이 예전보다 더 편해지고 가벼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작이나 미술치료에 들어갈 때 사람들에게 더 환하게 다가가서 신나게 놀아준다. “나는 바닥을 쳐야 되나봐. 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작업하면서 나처럼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것 같아. 그제야 우리가 모두 ‘사람임’을 다함께 느끼게 되는 거지. 우린 사람이야! 너도 사람이거든! 진짜야...” 그렇게 말이다. 작업을 하면서 우리 안에 숨죽이고 있던 것들이 힘을 얻어 표현하게 되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봐! 네 안에 생생함이 있잖아. 너를 믿어. 나도 나를 믿었거든.” 이렇게 작업을 반복하다 보면, 그 사람의 그림이 변하고, 변한 제 그림에 그 사람들이 놀라고, 부끄럽지 않은 작품이 나왔을 때 더불어 기뻐하고 경축한다.

난 아직도 그분을 찾고 있어

내가 하느님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이는 주변 사람들이 “넌 신앙이 없어!”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난 누구보다 열렬히 찾고 있는데... 난 죽은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해. 살아있는 신앙이어야지. 살아있는 신앙이란 나를 가슴 떨리게 하는 ‘그 무엇’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내 기운 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난 하느님의 현존을 잘 못 느껴. 난 아직 이방인인가 봐. 아마 내가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그래도 죽을 때는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하느님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 깊이 느끼면서 죽고 싶어. 지금은 죽을 수 없어. 아직은 그렇지 않으니까.”


그이는 하느님의 현존을 직접 느끼지 못하지만, 자신이 만나는 내담자들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게 하느님이 아닐까, 막연히 확신하고 있는 듯 했다. 절박한 사람들 안에, 그들 자신도 모르고 있지만, 그분이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부추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이는 아직 자신의 집을 짓기를 거부한다. 아직은 계속 길을 가야할 때라고 느끼지만, 언젠가 집에 정착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좋을 때, 그 때 만날 수 있는 게 하느님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그 길에서도 함께 만나서 같이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오늘 죽자!”라는 생각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을 하고, 오늘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고, 미련은 남기지 말자고 한다. 밖엔 여전히 눈이 내리고, 우리는 치료실을 빠져나와 왕만두국을 한 사발씩 먹고, 혜화동 성당 옆길을 지나 각자 가야할 곳으로 서둘러 갔다. 그이가 막 횡단보도를 건너 고개를 숙이고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행복하세요, 선배.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