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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이야기, 교과서에 써야”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북한은 그분들을 잡아간 것도 부족해서 존재까지 지워 버렸어요. 납북은 범죄이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사악하고 야만적인 범죄가 어디 있나요? 그 사람들은 ‘그림자’가 돼 버렸어요.”

지난 6월 25일 오후 서울 청량리에 있는 사무실에서 만난 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66)의 말이다. 북한 정권에 대해 이 이사장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사무실 벽에는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이 걸려 있다. 이 이사장의 아버지는 1950년 9월 4일 북한 정치보위부원에게 끌려간 뒤 행방을 모른다. ⓒ강한 기자
그의 사무실 벽에는 젊은 시절 활짝 웃고 있는 부모님이 나란히 찍힌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한국전쟁이 나던 무렵 유기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 이성환 씨는 북한 정치보위부 소좌라는 사람이 와서 데려간 뒤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 중이던 1950년 9월 4일, 지금 이 이사장이 일하고 있는 청량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서른 살 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북한이 끌고 간 구실은 해방 시기의 강력한 반공단체였던 ‘서북청년단’에 돈을 냈다는 이유였다. 이 이사장은 그의 아버지는 평안북도 박천군 출신으로 서북청년단에 자동 가입됐고, 형편이 어려워서 기부금도 적었다고 말했다. 저녁이 돼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만나러 지서에 찾아갔지만, 이번에는 본서에서 더 조사할 게 있다며 데려간 것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이 본 마지막 모습이라고 한다.

“9.28 서울 수복 뒤에, 북한이 끌고 간 사람을 다 죽였다는 소문이 났어요. 어머니는 시신이라도 찾아야겠다고 시신이 있다는 곳마다 다니셨대요. 형무소, 정치보위부, 경찰서.... 아버지 시신은 못 찾았죠.”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의 가족은 모든 방법을 다해 아버지를 찾고자 했지만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부산 피난 중에 첩보부대 사람에게서 아버지가 자강도의 포로수용소에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사실인지 알 수 없었다.

정부는 전쟁 중 북한이 정치적 목적으로 상당수의 유력인사를 납치하는 한편, 부역 동원과 인민군 충원을 위해 많은 사람을 강제 동원한 것으로 추정한다. 군인이 아닌 납북자는 ‘전쟁 중 납북자(전시 납북자)’와 ‘전후 납북자’로 분류되며, 관련 법률도 따로 만들어졌다.

이 이사장의 아버지처럼 한국전쟁 중 북한 측에 끌려가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이 이사장이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무총리 소속 ‘6.25전쟁 납북진상규명위원회’의 지난 3월 19일 발표에 따르면 2010년 위원회 출범 뒤 지금까지 3805명이 전쟁 납북자로 공식 인정됐다.

그러나 실제 납북 피해자는 훨씬 많다는 것이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납북진상규명위원회는 그동안 발견된 명부를 기준으로 가족단체에서 추정하는 납북자는 9만 6000여 명이라고 밝혔다. 전쟁 발발 직후부터 1963년까지 납북자 가족과 정부 차원에서 7개 이상의 전시 납북자 명부를 만들었다.

   
▲ 납북 피해 가족들의 송환 요구는 1950년대부터 있었다. 사진은 1954년 3월 11일 덕수궁에서 열린 송환 촉구 시위. (사진 제공 =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남한 정부는 2000년 이후 남북 장관급 회담, 적십자 회담 등에서 국군포로뿐만 아니라 납북자 문제 해결을 적극 요구해 왔지만 아직 성과는 적다. 통일교육원 자료에 따르면 2000년 제2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때부터 2010년 이산가족 상봉 행사까지 남한은 전쟁 중 납북자 21명의 생사 확인을 북한에 의뢰했고, 2명의 사망이 확인됐다. 이때까지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만난 가족은 2가족(7명)에 불과했다.

이미일 이사장은 전쟁 중 납북 피해 신고가 약 5000건에 불과한 것은 피해 가족들의 나이가 많아 시청이나 군청에 찾아가 해야 하는 신고를 어려워하거나, 이제 와서 신고해 봐야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라고 설명했다.

지난날 ‘연좌제’로 겪은 고통 때문에 지금도 한국 정부를 믿지 못하는 가족들도 있다. 이 이사장은 북한이 전쟁 때 잡아간 젊은이들을 간첩으로 훈련시켜 남한에 보내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납북자 가족들은 피해자이면서도 연좌제를 적용받았고 정부의 감시 대상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집안은 딸만 셋이어서 연좌제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지냈지만, 특히 납북 피해 가족의 아들은 직업 선택에 많은 제한을 받는 등 연좌제의 고통이 컸다고 한다.

법률에서 보상, 배상에 대한 내용은 없기 때문에, 납북진상규명위원회 심사에서 전시 납북자로 결정되더라도 금전, 물질적 혜택은 받지 못한다. 전시 납북 피해자 가족이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납북자 결정 통지서’ 발급, 아직 건립 추진 중인 ‘전시납북피해기념관’에 이름을 새기는 일이다.

‘통지서’는 특히 ‘월북’으로 오해 받아 피해를 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납북진상규명위는 향후 유해 송환, 생사 확인을 위해 납북 피해 신고인의 DNA를 채취하고 있으며, 납북 피해 가족을 이산가족 상봉 후보자로도 추천한다.

이미일 이사장은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정부가 진실을 제대로 밝혀 기록하는 것”이라면서 “기념관은 그 다음”이라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여러 번 “진실”을 강조했다.

“납북 피해는 이념 때문에 왔지만 우리는 이념을 논하자는 게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자는 것입니다, 진실! 진실을 말하고 기록하고 후손이 알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요. 알고 싶은 사람은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어야 되죠. 기념관 같은 게 없으면 배우고 싶어도 어디서 배우겠어요? 교과서에 쓰지 않으면 납북자가 없는 줄 알겠지요.”

개신교 신자인 이 이사장은 1940-50년대 분단과 전쟁 와중에 희생된 천주교인들을 한국 천주교가 ‘순교자’로 여기고 재조명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전쟁 중 납북자들에 대해서도 종교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납북자들이 전쟁터에서 총칼을 들고 싸운 사람은 아니더라도 사회 각계에서 대한민국 발전에 초석을 놓은 이들이라면서, 이들의 희생을 ‘순국’이라고 표현했다.

   
▲ 납북 피해 가족들의 송환 요구는 1950년대부터 있었다. 사진은 1954년 3월 11일 덕수궁에서 열린 송환 촉구 시위. (사진 제공 =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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