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러 종교를 이렇게 보실꺼야 - 성서와 이웃종교 18]
-사이비, 이단, 그리고 예수 2


거룩에서 자비로 - 예수의 모습

예수가 살던 사회는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9,2)는 계명에 따라 최선을 다하는 사회였다. 그 거룩함에 이르기 위한 여러 가지 율법들이 규정되어 있었는데, 무엇보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불결하고 부정하고 죄된 것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의미했다. 바리사이파가 나름대로는 이런 ‘분리’의 길을 걷고자 했던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결하고 부정한 삶에서 분리되기 위해 순결이나 청결, 성결과 관련된 법을 지켜야 했다. 그러한 정결을 지키는 사람을 의인이라 불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죄인이라 불렀다.

장애인이나 병자들, 거지 등은 부정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의로운 사람이라면 풍요롭게 잘 사는 것이 당연했지만, 가난하다는 것은 의롭지 못하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병이 들어도 죄에 대한 대가로 받아들여졌고, 당연히 불의한 자로 여겨졌다. 그리고 여자보다는 남자가 정결한 존재였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서 부정하고 무지한 존재이므로 신을 알 기회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소 극단적인 듯하지만, 당시 사회가 대체로 그랬다.

정결예법을 지키지 못해 부정한 자로 판단된 이가 다시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받으려면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제사를 드린 후 제사장으로부터 정결해졌다는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율법이 지켜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사회 전체가 이런 식으로 ‘거룩함’을 제도적으로 추구했다.

그런데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면서도 이러한 사회를 거부했다. 소수만이 거룩해지고 다수가 부정해지는, 소수만이 의롭고 다수가 죄인이 되는 사회 제도를 예수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한 예수의 가르침은 “하느님이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루가 6,36)는 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 때 거룩과 자비는 모두 하느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며, 결코 대립적인 말이 아니었다. 당연히 자비하신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기도 했다.

그러나 관례에 따라 ‘거룩함’을 실천한다는 명분 하에 생긴 분리와 차별의 병폐가 적지 않았다. 예수는 그런 병폐를 해결하는 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죄인을 용납하는 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하느님의 거룩함을 실천하는 방식이라고 믿은 셈이다. 당연한 말 같지만 이것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삶의 방식이었다. 부정한 자와 함께 하고 그들을 용납하는 순간 그 스스로도 부정한 자가 되어 거룩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고 간주되던 상황에서 스스로 거룩의 길에서 벗어나고 스스로 부정과 불결의 길로 들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은 전반적으로 ‘거룩함’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고대 이스라엘인의 삶, 특별히 지도자들의 삶의 방식에 정면 도전하는 형태로 나타났기에, 거룩하지 않은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자비에서 다시 거룩으로 - 오늘 교회의 모습

사진이스라엘과 영국의 법인류학자와 컴퓨터 프로그래머들이 공동 노력을 통해 재현한예수 얼굴(과학기술잡지 <포퓰러 머캐닉스>에 수록)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신을 거룩하신 분(聖父)으로 부른다는 사실이다. 성부, 성자, 성령, 성전, 성당, 성경/성서, 성도, 성물, 성구 등 모든 곳에 거룩할 성(聖)자를 붙여놓는다. 또 성경에서는 예수에 대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놓고 있지 않지만, 후세 기독교인들은 아주 깨끗해 보이고 거룩해 보이는 얼굴로 탈바꿈시켜놓았다.

예수는 ‘자비’를 가르쳤지만, 제자들은 다시 ‘거룩’을 강조했다. 그 거룩을 실천한다며, 잘 지은 건물, 잘 만든 물건 등 외양에 신경 쓰고, 그래서 교회 열심히 짓고, 남다르게 치장하는 일이 다반사로 생겼다. 이른바 종교의 제도화이고, 형식화인 것이다. 그러면서 부정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이 ‘거룩’의 반열에서 분리시키거나 분리시키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기는 예나 이제나 크게 다르지 않다.

자비의 이름으로 사람을 ‘포용’하기보다는, 거룩의 이름으로 다시 사람을 ‘분리’시키는 일이 여전히 교회 안에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종파가 다르면, 다른 종교 이름이 붙어있으면,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차별하고 분리시키는 것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하던 예수 시대 기성 교단 사람들을 꼭 닮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러한 거룩 지향적 제도화, 형식화는 자비를 온 몸으로 살았던 예수의 정신, 진정한 종교의 본질에서 멀어진다. 스스로 예수에게서 비롯된 정통의 길을 간다지만, 그럴수록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정통의 길에서 멀어져 가게 되는 것이다. 거룩의 이름으로 죽임당한 예수가 도리어 옳다고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상당수 그리스도인들은 정통의 이름으로 다시 예수를 죽이는 길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 

죽여야 할 예수, 살려야 할 예수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선불교의 격언이 있다. 한 마디로 아무 데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른바 정통이라는 데에도 매이거나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끝없이 새로워야 한다는 뜻도 된다. 정통에 대한 굳어진 개념이 정통을 비정통으로, 이단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매이지 않고 본래 정신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정통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변화이다. 굳어짐 안에는 이웃을 받아들일 공간이 없다. 이웃을 분리시킨다. 그래서 반생명적이다. 정통(orthodoxy)의 길 위에 있다지만, 정통의 이름으로 이웃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비정통, 즉 이단(heterodoxy)이다. 역으로, 스스로 굳어지지 않고 이웃을 포용하고 살리는 삶으로 나타난다면 그 순간 그것이 비정통의 길 위에 있는 듯해도 사실상 정통의 길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 어떤 행위로 나타나느냐에 따라 교회당이 비정통일 수 있고, 다른 이름이 붙어있는 종교가 정통의 길을 가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정통, 달리 말해 ‘이단’이란 한편에서 적극적으로 풀면 그리스도인에게 늘 추구의 대상이다. 예수가 당시 이단이었고, 붓다가 당시로서는 이단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이단성은 단순한 비도덕적, 반윤리적 이기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매이지 않고 끝없이 깊은 진정성을 추구하되, 결국은 사람들을 살리고 창조적으로 변혁시켜줄 움직임이다. 그리스도교적 정체성을 고백하는 이라면 스스로 영원한 이단자의 길, 그런 의미의 정통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예수에게도 죽여야 할 예수가 있고 그렇게 죽임으로써 살려야 할 예수가 있는 것이다.

이찬수 / 종교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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