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세상-한상봉] 교황의 발도파 방문을 축하하며

프란치스코 교종이 지난 6월 22일 이탈리아 토리노에 있는 발도파 교회를 방문해서 용서를 청한 사건을 지켜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지금은 개신교회가 되었지만, 발도는 종교개혁 이전인 12세기 후반에 청빈운동과 교회개혁을 주장하다가 파문당했던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벌써 20여 년이 지난 일이지만,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간사로 일할 때 기억이 새삼스럽다. 이 단체는 교회 비공인 평신도 노동운동단체였고, 당시 노동운동에 비판적이던 한국교회 주교들은 이 활동이 계급운동에 너무 깊이 개입하고 있다면서 소외시키고 있었다.

어머니이신 교회가 나를 박해한다

20여 년 전 뜨거운 여름날 겪었던 이야기 한 토막. 지하철공사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노동자들은 명동성당에서 찬밥 신세였다. 결국 성당 들머리가 소란스럽다는 이유로 본당 사목위원들이 천막을 부수고 명동성당에서 이들을 쫓아냈다. 이들이 옮겨간 농성 장소는 조계사였다. 며칠 뒤 <한겨레신문>에 조계사 농성장 천막 바닥에 스님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마주 앉아서 파안대소하며 수박을 쪼개 먹는 사진이 실렸다. 당시 노동사목 간사로 일하던 나는 무척 당황스럽고 창피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심했다.

명동성당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이 조계사에서 환대받는 현실을 예수께서 보신다면 뭐라 말씀하실까? 스님들이 어리석기 때문에 무도한 자들을 환대한 것일까, 아니면 명동성당 측이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겠다고 선포하셨던 예수의 뜻을 거스른 것일까? 나는 ‘손님과 불청객’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썼다. 명동에서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조계사에서 손님으로 둔갑한 곡절을 따져 묻는 내용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처지를 두고서, 복음서와 역대 교황의 사회교리를 가져다 대조해 보았다. 아무래도 교회가 취한 태도는 옳지 않았다. 예수는 당연히 현장에서 떠밀려난 그들을 손님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게 교회전통에서 말하는 ‘환대’의 정신이다. 낯선 이를 우리 식탁에 앉히고 식구처럼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환대다.

함께 일하던 선배가 이 글을 전국 각 본당에 팩스로 날렸다. 물론 명동성당에도. 이를 두고 명예 훼손이라고 생각했을까. 퇴근해서 집에 와 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명동성당의 모 신부님이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연락을 드렸더니, 그 신부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계셨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라는데, 화를 키우고 계셨던 그 신부의 첫마디는 “당신 천주교 신자 맞아?”였다. 내가 그 신부의 부하직원도 아닌데 처음부터 끝까지 반말로 일관했다. 명동성당과 천주교를 욕 먹인다는 거였다. 내 입장을 말씀 드리려고 하자, 말을 끊으며 한 마디 했다. “난 네 말을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게 아냐. 다음부턴 글 쓸 때 신부 허락 받고 써!”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참으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제였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출신의 다른 노동사목 선배들도 이 당시 교회 안에서 설움을 많이 당했던 모양이다. 피정을 할 때면 소회를 털어놓는 자리에서 늘 눈물을 찍어 냈다. “나는 박해한 것은 어머니이신 교회였다” 라는 것이다. 신앙심이 깊은 선배일수록 다가오는 슬픔은 더욱 컸다. 약 800년 전 발도파 사람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발도파 교회의 목사인 에우제니오 베르나르디니를 만나 포옹하면서, 당시 발도파 사람들을 교회가 단죄한 것은 “비그리스도교적이고 비인간적 태도와 행위였다”고 반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달라”고 청했다. 교종은 “신앙의 이름으로 저지른 폭력과 갈등을 보면 슬퍼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서로 다른 신앙고백 때문에 박해받은 이에게 이보다 더한 위로가 있을까, 싶다. 

교회개혁, 예언적 행동과 사제적 동의로

▲ P. 네메슈헤지이(네메세기), "하느님을 찾아서", 분도출판사. 1975
한국교회의 경우에 최근에 의정부 교구에서 교구장 주교가 직접 진보성향의 평신도와 수도자 한 사람을 지명해서 200여 명이 참석하는 사제연수에서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강의를 청한 것은 특별한 사례다. 아마 프란치스코 교종의 영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교종은 평소 교회개혁에 대한 관심을 깊이 표명하며 ‘교황직 쇄신’부터 시작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교회는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관료나 정부의 공무원처럼 행동하는 성직자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이들을 의식한 듯이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는 양떼들도 동반할 수 있어야 한다”며 “단지 문을 열어 놓고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교회가 되도록 노력하자”고 권했다.

이 점에서 네메슈헤지이 신부가 “하느님을 찾아서”(분도출판사, 1975)에서 프랑스 신학자 로랑탱의 저서를 인용해 다섯 가지 유형으로 가톨릭신자를 분류한 것은 의미가 깊다. 이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으로 교회를 복귀시키려는 ‘보수적 그리스도인’(Conservative Christian),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교회당국의 승인을 얻어 교회를 쇄신시키려는 ‘진보적 그리스도인’(Progressive Christian), 복음대로 살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교회’를 이루기 위해 헌신하면서 제도교회의 관행에 항의하는 ‘급진적 그리스도인’(Radical Christian), 교회의 제도와 활동에 실망해 교회를 떠났지만 여전히 가톨릭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개인적 그리스도인’(Individual Christian), 기성교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 대안교회를 세우려는 ‘지하교회 그리스도인’(Underground Christian)이다.

네메슈헤지이 신부는 “교회개혁은 급진적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행동에 자극을 받아서 진보적 그리스도인이 용기 있게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교회가 분열되지 않으면서, 영원한 젊음인 성령의 힘으로 일치 안에서 교회의 젊음을 되찾는 현실적인 방법은 예언적 행동과 사제적 동의가 결합되는 것이다. 결국 교회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교회를 젊게 만드시는 성령에 대한 신뢰’다. 이 신뢰가 사라지면 우리는 너무 쉽게 희망을 버리거나, 교회를 떠나 다른 분파를 만들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심게 된다. 어차피 교회 안에는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들이 다른 형제자매이거나, 동료 사제나 주교가 될 수 있다. 교회개혁이 동전을 뒤집듯 하루아침에 이뤄질 게 아니라면 서로 다른 생각에 대한 존중심이 필요하다. 프란치스코 교종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지만,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교회를 개혁하겠다고 말했다.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 발도파

▲ 독일 보름스에 있는 루터 기념관에 세워진 피에르 발도의 동상.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
프란치스코 교종에게 영감을 준 사람은 분명히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을 것이다. 그런데  피에르 보데(발도) 역시 프란치스코의 다른 얼굴이었다. 교종은 “저는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198항)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이 말은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면서, 발도가 추종자들을 모아 설교를 할 때 떠올렸던 교회상이다.

프랑스 리옹의 부유한 상인 출신이었던 발도가 마태오 복음 10장 5절 이하를 읽으며 청빈의 이상을 발견한 것은 1173-76년이었다. 프란치스코가 이탈리아 아시시 근방 포르티운쿨라 성당에서 마태오복음 10장 5절 이하를 읽고 사도생활을 시작한 것은 1208-09년이었다. 덧붙여 이 두 사람에게 깊은 영감의 원천이 된 것은 마태오 복음 19장 21절이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리옹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리던 발도파는 거친 신발을 신고 다녀다는 이유로 ‘신발파’(Sandalati)라고도 불렸으며, 스스로는 ‘그리스도의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발도는 어느 사제의 조언을 받아 회심한 이후 두 딸을 퐁테브로 수녀원에 보낸 뒤, 아내에게 재산의 일부를 떼어 주고는 나머지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서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사제였던 베르나르 이드로와 안사의 스테판을 고용하여 복음서와 교부들의 어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추종자들을 둘씩 짝지어 거리와 촌락으로 파견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을 설교하도록 했다. 위협을 느낀 리옹의 주교가 평신도는 신앙문제에 대해 언급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설교를 금지시키자,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며 거부했다.

결국 하느님 앞에서 교회권위의 명령을 상대화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발도파는 2명의 회원을 1179년 제3차 라테라노공의회에 보내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승인해 줄 것과 설교할 자격을 달라고 간청했다. 한편 교황에게 자신들이 번역한 프랑스어 성경을 선물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토리노 발도파 교회가 프랑스어 성경을 선물한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복음서를 프랑스 민중에게 되돌려 주려는 발도파의 생각을 교황은 동의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 당시 교황의 반응은 아예 복음서를 성직자 외에는 읽지 못하도록 엄금했다. 교회에서 성경이 평신도에게는 ‘금서’(禁書)가 된 것이다. 당시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은 발도파의 청빈생활을 칭찬했지만 설교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1184년에 루치오 3세 교황은 발도파가 주교의 승인 없이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추방하는 ‘아나테마’(anathema)를 선언했으며, 발도파는 여기에 응하지 않았다. 발도는 자신의 내적인 소명을 중시하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파견되었다는 확신을 지녔다. 그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완전한 청빈을 사는 자만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자격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교황은 교회권력에 저항하던 발도파를 즉시 파문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학살당한 ‘그리스도의 형제들’

▲ 발도파를 화형시키는 프란치스코회 수사. 당시 교황청은 종교재판을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 맡겼다.
이 때문에 기성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발도파는 산상설교에 근거한 설교와 가난을 통해 ‘복음적 완전’을 꾀했으며, 맹세와 사형을 금하고, 성경에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더러는 연옥과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배격했다. 기도도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 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자발적 가난’은 가톨릭교회에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 영감에 공감한 대표적인 인물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라고 보아도 좋다. 그렇지만 교황은 1197년 발도파에 대한 화형포고령을 발동했다. 리옹에서 추방된 이후 발도파는 계속된 박해로 이탈리아, 독일,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스위스로 흩어졌는데, 1380년에는 169명이 역설적이게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에게 화형당했고, 1645년에는 스위스 가톨릭 군대가 발도파 마을 22개를 전멸시켜 약 4000명 가량이 죽었다. 1560년에는 스페인에서 2000명이 화형당하고, 1600명이 투옥되었다.

발도파의 마지막 피난처는 바로 이탈리아 서북부의 알프스 산맥을 이고 있는 피에몬테다. 당시의 학살을 두고 “실락원”을 쓴 밀턴은 “주여, 학살당하는 당신의 신도들을 복수하소서. 저들의 뼈가 추운 알프스 산맥에 널려 있나이다”라고 적었다. 다행히 1848년 프랑스 황제가 ‘해방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발도파는 적어도 피에몬테 계곡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었고, 거기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다. 이 법령이 공포된 2월 17일을 그들은 ‘발도파 해방기념일’로 경축하고 있다. 발도파는 현재 4만 5000명 가량이 이탈리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등에 남아 있다.

한편 공교롭게도 피에몬테는 프란치스코 교종의 부모와 조부모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의 이상이라는 DNA는 피에몬테에서 아르헨티나를 거쳐 다시 로마 교황좌에 돌아왔다.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배다른 형제’인 피에르 발도의 생각이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의 교종 안에 머물고 있다. 이 교종이 새로운 교회를 위해 착실하게 벽돌을 쌓고 있으며, 그 길에서 발도파를 만나 화해하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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