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콘 응시]

 

En Cristo
소임 이동을 하다가 어디에서 분실되었는지 모르지만 10여년 전에 선물로 받았던 4절지 크기의 화지에 그린 촛불 가득한 그림이 생각난다. 평범한 직장인이면서 무엇이든 그리기를 좋아하다 보니 붓을 잡게 되었다는 그와 좋은 친구로 지내다 떠나는 나에게 준 그림이였다. 처음엔 생뚱맞는 그림같아 무슨 의미로 그렸는지 물어 보니 그는 ‘최후의 만찬’이란다.

굵은 그의 손가락이 하나 하나 짚는 그림 속의 초에는 각각 이름이 있었다. 당연 예수를 상징하는 초에는 후광처럼 그려진 원이 있었고 베드로의 초는 다른 초 보다 굵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림 한 장으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쏟아 낼 수 있는 그가 신기하여 설명을 듣는 동안 난 “오!~” 하며 감탄을 연발하였던 것 같다.
성경에 대한 해박함에도 놀랐지만 그림의 각 초마다에서 풍겨 나오는 남 아메리카적인 색감의 표현에 인물 적용을 참 잘하였던 것 같아 더욱 놀라워 하였다.

초 한 자루는 꺼져 있었다.
켜졌다가 막 꺼진 듯 심지가 까맣게 탄 자리엔 가는 연기 한줄기 올라가고 있었다. 가리옷 사람 유다란다.

최후의 만찬 15세기
Trinity-Sergius Lavra의 삼위일체 주교좌성당, 러시아


자! 이제 이콘을 바라보자.
‘최후의 만찬’이다.
차분한 색감에 비해 많은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러나 처음엔 어디에서도 마음까지 와 닿는 그 무엇이 잡히지가 않았다.
어떤 이콘은 바라보는 순간 가슴까지 떨림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며칠을 바라보아도 눈조차 울리지 않는 이콘이 있다. 사실 이 이콘은 다른 이콘과 다르게 며칠간 바라보았지만 그러하였다. 12제자들의 모습 또한 각자의 생각으로 가득차 있는 듯 하나 이콘이 전하고자 하는 소리를 어디서 들어야 할지 막연하였다.

다시 이콘을 살펴보자.
붉은색 아몬드 모양의 쿠션 위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은 바로 주님의 현존을 의미하는데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며칠이 지난 뒤에야 이콘을 응시하다가 잠시도 눈을 깜박일 수 없는 숨막힘을 느낀 것은 바로 예수님의 품에 있는 사도 요한과 배반자 유다가 같은 기울기로 몸을 숙이고 있는 모습이였다.

두 사람의 몸 중 한 사람은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지만 다른 한사람은 손을 뻗으면서 세속적인 기준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의 마음과 배신의 마음, 같은 기울임 안에서 두 사람의 마음의 차이는 완전히 다르다.

이 두 사람의 기울임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숨막힘은 바로 그분의 마음 때문이었다. 수난을 앞두고 예수님의 품에 기대고 있는 제자의 애틋한 마음을 바라보는 그분의 마음과 눈 앞에 있는 사람의 배신을 바라보는 그분의 그 마음이 어떻게 표현 할 수 없는 아픔처럼 다가왔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향하는 마음을 고백한다. 때로는 성인 성녀가 멀리 있지 않구나, 느끼고 된다. 모두가 다 성인(聖人)들 같고 정의롭고 세상에 그가 가장 의로운 자로 느껴지게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들다가도 답답함을 떨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이 전해오기 때문인데 그것이 무엇일까?

그래도 모두가 정의롭겠지? 모두가 평화를 원하겠지? 모두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지? 모두가 그렇게 외치며 그분께로 몸을 기울이겠지? 이러한 우리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실까?

우리 안에 어떠한 마음이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내 마음의 선과 악은 어디로 향하여 몸을 기울여 손을 내밀고 있을까?

이 이콘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마음을 요동케 한다.


임종숙/ 루시아 수녀,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수원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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