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영 신부] 6월 14일(연중 제11주일 ) 마르 4,26-34

"하느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장 핵심 주제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리적인, 물리적인 영토를 가진 공간으로서의 어떤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과 평화가 있는 세상, 하느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이 우리 삶과 이 세상에 이루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은 예수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명이었고 지난 2000년 동안 교회가 추구해 온 목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아주 작은 겨자씨에 비유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박홍기

꽃나무를 보면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 나무가 이렇게 예쁜 꽃을 피우기 전에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었을 것이다. 과일나무를 보면서도, 이렇게 풍성한 과일을 맺기 이전에는 하나의 작은 씨앗에 불과했을 것이다. 숲속에 앉아 커다란 나무들을 바라볼 때도, 이 나무가 이렇게 성장하기 이전에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보는 하나의 작은 씨앗에는 이미 그 안에 꽃들과 과일이 담겨 있고 큰 나무가 이미 숨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나의 씨앗에는 수십 억 년의 생명의 역사가 압축되어 있다. 그리고 이 씨앗을 통해 생명의 역사가 전개될 수 있다. 예컨대 꽃씨 하나에 수십 억 년 동안 피고 졌던 꽃나무들의 생명의 역사가 담겨 있고, 이 꽃씨 하나를 통해 앞으로 수천 수만의 꽃나무들이 피고 질 수 있다.”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의 나라의 시작은 아주 작지만 언젠가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눈에 확 띄게 드러나거나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겨자씨의 비유는, 우리 일상의 삶에서, 작고 작은 것들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라는, 희망을 보라는 말씀으로도 이해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듯이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피정을 동반할 때 체험하는 것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할 때 보통 세 가지 양태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인 역동이 일어나는 경우(하느님의 위로), 아니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 그리고 말씀에 대한 저항이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하느님의 고독/실망).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또한 이를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말씀에 대해 저항이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불편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용서하라, 사랑하라, 화해하라 등등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밀어냅니다. 이것은 곧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마음 안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에도 저는 긍정적으로 봅니다. 분명 말씀은 우리를 변화시켜 나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고 흔들림이 클수록 하느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씨앗인 하느님의 말씀, 이 씨앗에 얼마나 큰 가능성이 담겨 있는지 저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삶의 힘을 얻고, 삶의 희망을 보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가난한 마음 밭에 뿌려지는 하느님 말씀의 씨앗, 그 씨앗 안에는 풍요로운 생명이 담겨 있었습니다. 내 마음 밭에, 내 마음의 정원에 무슨 꽃들이 피어 있는지요? 무슨 나무들이 자라는지요?
 

 
 

최성영 신부 (요셉)
서강대학교 교목사제
예수회 청년사도직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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