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청춘 - 변지영]

“여러분과 여러분의 친구들은 젊은 시절의 특징인 낙관주의와 선의와 에너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젊은이들은 과연 낙관의 에너지로 충만한가? 작년 8월 아시아 청년대회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시아 청년들에게 ‘젊은이다운 낙관주의’를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으로, 윤리적 덕으로, 순수한 사랑으로 변화시킬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체로 한국 청년은 우리 자신과 미래를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희망이 없는 세대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저기에서 팽배한 불신을 찾아보기 쉽다. 그것이 사회에 대한 것이든 제도에 대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것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든.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친 평가인가?

20대 사망률 1위 자살, 20대 고용률 50퍼센트대, 해외이민 고려 경험 20대 20퍼센트 이상, 20대 투표율 평균 40퍼센트대. 이 지표로 20대가 자신들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점치고 낙관을 잃어간다고 단정 짓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지만, 당장 피부로 느껴진다. 보다 넓은 경험과 풍부한 지식을 쌓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뒤처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 이상이 되지 않는 현실. ‘낙관이 밥 먹여 주나. 그냥 살아. 받아들이고 미리 준비하는 게 낫다.’ 대학에선 내 밥그릇 걱정이 학문도 철학도 모두 덮어 버렸는데 무엇을 더 말하랴.

낙관이 밥 먹여 준다

그러나 영양소 골고루 갖춘 밥을 먹으려면 결국 낙관이 필수적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적 신뢰’라는 개념과 연관시킬 수 있다. 일반적 신뢰란 대다수의 사람을 향한 넓은 신뢰로, 좁고 깊은 개별적 신뢰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이것에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기저에 깔려 있다. 대체로 낙관적인 사람은 논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과 거리가 멀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논리적으로 봐도 낙관적인 사람이 많을 때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진다. 대부분의 사람을 믿을 만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야 국가와 조직이 더 매끄럽게 잘 운영될 수 있다. 서로를 잘 믿는 나라일수록 부패가 심하지 않고 사법제도가 효율적이고 관료주의의 폐해가 덜 하다. 또 부의 재분배가 잘 이뤄지고 경제 개방도 역시 높아진다. 그래서 일반적 신뢰는 우리 사회가 구축해야 할 공공 자산이기도 하다. 낙관과 믿음이 파이를 더 크고 나누기 쉽게 한다는 것이다.

믿음이 없으면 부패하고 균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서구 국가로 대표되는 개인주의 문화보다 집단주의 문화의 아시아권에서 일반적 신뢰가 낮게 나타난다. 사실 집단주의라는 개념을 더 정확히 표현하려면 집단 앞에 내(內)라는 글자를 붙여야 한다. 나의 집단, 즉 내집단을 향해서는 깊은 신뢰가 있는 반면 외집단을 향한 신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나의 사람, 나의 가족, 친지는 믿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못 믿어.” 이것이 우리 사회가 그렇게 학연 지연 혈연으로 삐거덕거리는 이유다. 낮은 일반적 신뢰가 높은 부패로 이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한 외집단을 향한 경계와 배척, 편가르기와 비난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설명 가능하다. 자아정체성과 집단의 정체성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개념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자기 자신을 정의하는 데 있어  자신이 속한 집단이 큰 부분을 차지하기 쉽다.

나를 정의할 때 내(內)집단에 대한 정의 역시 포함되는 것이다. 어느 학교 몇 학년 누구, 어느 지역 누구의 몇째 누구. 우리가 이런 식의 자기소개가 익숙하다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는 안타깝게도 자연스레 내집단이 아닌 외집단에 대한 배척으로 이어지기 쉽다. 내집단이 상대적인 우월감을 취하면 그것이 곧 자아정체성의 우월감으로 이어질 수 있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외집단을 비하하거나 자신의 집단보다 더 못한 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지역주의가 있지 않은가. 사회 정체성이 자아 정체성의 일부로 규정되고 그 과정에서 내집단 편애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일반적 신뢰가 낮은 사회에서 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 작년 8월 17일 해미읍성에서 열린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에 참가한 청년들.ⓒ교황방한위원회

나를 믿자. 그래야 남도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신뢰를 키울 것인가? 이 질문에 앞서 묻고 싶다. 왜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하는가? 왜 그렇게 편을 가르고 배척하는가? 그 실체는 ‘두려움’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서로를 믿지 못한다는 건 내, 외집단 간 벽이 높다는 것이다. 자 그럼 이제 해결책이 보인다. 내집단이 나를 정의하는 것을 중단하라. 내집단이 우월해진다고 나 자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객관적 사실을 바라보자.

사실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내집단이 아닌 그저 나 자신의 생각이, 정체성이 보장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체로는 용기 내기 힘든 것이다. 타자화는 본능이다. 의지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타자화가 곧 집단 간 균열과 서열화로 이어지고, 이에 높은 자리에 있다고 판단되는 집단에 소속하고자 노력하고 또 다시 내집단이 나를 정의하게 되는 쳇바퀴는 얼마든지 의지로 끊어낼 수 있다. 믿음으로 말이다.

나를 믿는 것, 어느 집단의 누구 말고 본디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도 괜찮을 거라는 용기, 자연스레 따라 오는 타인에 대한 믿음으로. 그 믿음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할 ‘젊은이다운 낙관주의’가 아닐까. 우리 사회를 냉정히 바라보고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은 그러한 믿음과 별개가 아니다. 오히려 가능성과 희망을 믿는 이가 의지를 발휘하기 쉽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세상을 제로섬(zero-sum)이 아닌 윈윈(win-win)으로 바라볼 때 협력이 가능해지듯 말이다.

그래서 특히 앞으로의 문화 형성에 사명을 가지고 있는 우리 젊은 세대는 의식적으로라도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믿을 필요가 있다. 일반적 신뢰를 높이는 일이다. 사회적 자산을 키우는 일이다. 또한 개인의 행복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이 정도의 낙관은 지니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헬렌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이란 산산조각 난 세상을 빛으로 나오게 하는 길이다. 타인에 대한 믿음이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든 헬렌 켈러는 믿음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희망이 없다고 믿는 젊은이여, 나의 동지여, 다듬고 고치려는 의지는 그대로 두고 믿어 보지 않겠는가. 그대 자신을, 곁의 그 사람을, 그 믿음이 이루어 낼 당신이 원하는 우리 사회를.
 

 
 
변지영(스텔라)
서울대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58대 의장
숙명여대 가톨릭학생회 글라라 57대 회장
숙명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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