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야기-6] 포도원 주인의 비유

예수님이 활동했던 당시 이스라엘에서 인기가 높았다는 점은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런 까닭에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인상대로 그분의 정체를 설정해 나름의 호칭으로 불렀다. 그 호칭 중에는 이스라엘 땅에서 붙여진 것들도 있지만 또 다른 상당수는 복음이 지중해권으로 전해졌던 1세기 말엽, 헬라세계에서 붙여진 것들이다. 지난 호까지 살펴본 호칭들이다. 물론 우리가 점검한 것보다 훨씬 많은 호칭들이 있지만 기회가 닿으면 또 소개하기로 하고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님이 핵심에 둔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사랑, 자비, 율법해석, 전통, 종말, 구원, 부활 등을 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 모든 개념들을 한 번에 묶을 수 있는 총제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 답은 자명하다. 바로 하느님이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느님만 알았고 하느님을 따랐으며 하느님에 살고 죽었다. 만일 오늘 예수님을 만나 물어보아도 아마 같은 답을 하실 것이다. “하느님밖에 난 몰라!”

예수님이 알고 있는 하느님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긴 가르쳐야 하는데 그 작업이 결코 쉽지 않았다. 인간의 이해력이 문제였다. 아무리 이스라엘 최고의 천재 율법학자라 한들 하느님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물며 무지렁이 창녀에게는 어떠했으랴?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율법에서 즐겨 사용하는 고난도의 해석방법(산파술, 결의론, 예형론 등)을 사용하지 않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비유'로 하느님을 풀어냈다. 그리고 말씀했다. “귀 있는 자들은 알아들으라.”

▲ 예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면서 먼저 '하느님 나라'를 찾으라고 하셨다. ⓒ한상봉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수확 철이 되자 일꾼을 구하러 나섰다. 당시 이스라엘은 열악한 경제 사정에 놓여있었고, 하루 품팔이 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히, 포도수확 철쯤 되면 일거리가 쏟아지기에 인력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포도는 원래 햇빛이 많은 지역에서 잘 자란다. 평소엔 일손이 많이 가지 않지만 수확 철엔 한꺼번에 거두어야 하고, 그로부터 며칠 내에 포도주까지 담가야 하니 당연히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수확 철엔 인력시장이 활기를 띤다. 일용직 노동자에겐 대목이었던 것이다.

주인을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인력시장에서 어림짐작으로 일꾼들을 불러왔다. 아마 주인 생각에 이 정도면 오늘 작업을 마치기에 충분한 숫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다들 신나게 일을 해서 내친 김에 오늘부터 포도주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려면 사람이 더 필요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면 반대의 경우도 있다. 일꾼들의 능력이 영 모자라 사람을 더 불러와야만 일을 끝낼 것 같았다. 아무튼 모두 네 번이나 부르러 나갔고 덕분에 겨우 해지기 전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이제 품삯을 받을 때가 왔다.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는데 사실 이 정도면 공정한 액수였다. 원래 한 데나리온을 약속해 놓고 나중엔 딴 말하는 주인이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우리가 먹은 점심 값마저 제하고 주는 악독한 놈들도 있다. 이 양반 얼굴을 보니 후덕한 인상이 임금을 더 주면 주었지 깎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어라, 나중에 합류한 사람부터 품삯을 주네. 아침부터 일한 우리에게 먼저 지불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무튼 주인은 갑이고 우리는 을이니...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주인이 마지막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친구에게 떡하니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는가? 그들은 체격도 왜소하고 능력도 떨어져 일자리를 못 얻었던 자들이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며 구차한 통사정을 입에 달고 사는 찌질이들이다. 주인이 이 정도로 통이 큰 양반이라면 나는 아침부터 일했으니 적어도 열 데나리온은 받게 되리라. 횡재했네 그려.

헌데 이거 보시오 주인, 내가 왜 한 데나리온이요? “뙤약볕 아래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를 한 시간만 일한 저들과 어찌 같은 취급을 하시오. 나도 이쪽에서 뼈가 굵었지만 이런 몰상식한 경우는 처음이요. 당장 고용노동부에 부당사례로 신고라도 할까요?

아침부터 일한 노동자의 반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주인은 잠시 후에 대답한다. 신고하려면 하시오. 당신하고 내가 맺은 계약서엔 일당 한 데나리온으로 명시가 돼 있으니,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말이오. 그리고 내 돈 갖고 내 맘대로 쓰는 데 도대체 당신이 왜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참견을 하시오.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잘 알아서 한 마디 하겠는데, 남이 잘 되었다고 시기하지 마시오.

위의 이야기는 마태 20,1-16을 풀어본 것이다. 물론 이야기에서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고 아침부터 일한 자는 신앙우등생을 자처했던 종교지도자들이며 한 시간만 일한 자는 죄인, 세리, 창녀 등의 소외계층이다. 예수님이 알려주는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이 세운 정의 기준과 완전히 다르게 돌아간다. 철학용어를 빌리면 하느님은 절대타자(絶對他者)라 하겠다. 그래서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살 길을 열어주시는 분. 한 시간만 일한 자에게도 먹고살 만한 삯을 줄 정도로 대자대비하신 분인 것이다.

비유를 듣고 나니, 죄인 중에서 상 죄인인 나에겐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박태식 신부
/ 대한성공회 장애인 센터 ‘함께 사는 세상’ 지도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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