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교회-유영숙 루시아 씨 인터뷰]

▲ 유영숙 씨는 용산참사로 먼저 이승을 떠난 남편과 함께 있다. ⓒ이희연

많은 눈이 내리던 지난 1월 18일, 순화동 철거 지역에는 생존권 보장을 외치는 천막 하나가 세워졌다. 천막에는 2009년 용산참사 때 숨진 故윤용헌 씨의 부인 유영숙 씨와 이때 중상을 입었던 지석준 씨가 머무르고 있다. 2007년, 용산보다 먼저 강제철거가 집행되었던 순화동 철거 지역에서 농성 중인 유영숙 루시아 씨를 만났다.

용산참사 당시 순화동 철거민대책위원장이었던 故윤용헌 씨는 지석준 씨와 함께 용산 철거현장에서 연대투쟁을 하고 있었다. 유영숙 씨는 “원래 경찰과 조율하는 과정이 있는데, 용산 때는 조율도 안 하고 갑자기 철거를 진행했다.”면서 “다른 지역에서 연대투쟁 온 사람들조차 망루에서 내려올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말로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해준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갑작스럽게 진행된 철거만이 아니다. 故윤용헌 씨의 죽음은 망루 4층에서 화염에 휩싸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유 씨에 따르면 시신 확인 과정에서 마주한 고인의 모습은 얼굴이 그을린 정도였다. 대신 붕대로 감아놓은 복부는 내장기관을 다 도려낸 것처럼 비어있었고, 다리는 포를 뜬 것처럼 군데군데 살점이 없었으며, 오른손은 잘려나간 상태였다고 했다. 화염에 휩싸여 사망한 시신에 있어야 할 수포도 없었다. 결국 남편의 사망원인은 구타 등 다른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영숙 씨는 “연대투쟁 중에 남편을 잃었는데, 지금 순화동엔 두 사람만 남아 싸우고 있다는 것이 힘들다.”면서 “몸이 좋지 않아서 힘들고, 아이들도 챙겨줄 수가 없어 안타깝다.”라고 어려움을 전했다. 평일엔 식당을 운영하고 주말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다복하고 평범한 생활은 가장을 잃고 무너졌다. 이웃하던 사십 여 개의 가게 주인들은 계속적인 투쟁에 지쳐 몇 푼 안 되는 돈을 들고 떠나갔다. 삶의 터전을 잃은 이들이 바라던 것은 그저 ‘계속 장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 씨의 바람은 철거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함께 철거로 인해 파괴되는 가정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것이다.

▲ 지석준 씨와 유영숙 씨는 지금도 공사장을 들락거리는 레미콘 차량에 맞서 건설사에 항의하고 있다. ⓒ이희연

순화동 지역은 철거 이후 다섯 해 가까이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이 년 전 다시 재개되었다. 참사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용산과 달리, 순화동은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는 철거 지역이다. “몇 년에 걸친 긴 투쟁이 힘들어 포기할까 고민했다.”는 유 씨는 “여기도 용산참사의 연장선”이라고 말하면서 “두 명뿐이지만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차라리 천막을 치고 투쟁하는 지금이 행복하다. 천막 치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더 답답하고 힘들었다.”면서 “잃은 것도 있지만 얻은 것도 많다.”고 고백한다.

천막 농성을 시작하면서 유 씨가 얻은 가장 큰 선물은 신앙과 좋은 사람들이다. 용산참사 때 함께 하던 문규현 신부가 쓰러졌을 때, 힘이 되어준 문 신부마저 잃을까 두려웠던 유 씨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서대문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하느님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보내주셔서 감사하다.”면서 고마운 이름들을 하나씩 늘어놓는 유 씨의 표정이 밝았다. “함께 연대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병원에 실려 갔을 것”이라는 유 씨의 곁에 매주 어김없이 찾아오는 벗들이 있다. 목요일에는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에서, 주일에는 예수회 사제들이 순화동에 와서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

하루에도 몇 번 씩 드나드는 레미콘 차량을 막아서는 일은 고되지만, 유 씨가 투쟁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순화동에서 승리하는 것이 다른 철거지역에도 희망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철거로 빼앗긴 생존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들지만, 투쟁에 승리해서 끝까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유영숙 씨는 여전히 순화동 천막에 있다.
 


이희연 기자
/ 뜻밖의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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