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이장섭]

▲ 예수가 서있는 곳은 베풀고 도와주는 쪽이 아니라 소외되고 지쳐있는 사람들 쪽이다.
<구호 라인에 서있는 그리스도>, 프리츠 아이젠버그, 1953.

가톨릭 일꾼 운동을 주도한 도로시 데이의 친구로 인상적인 목판화를 그려온 프리츠 아이젠버그(Fritz Eichenberg)는 ‘가톨릭 일꾼’ 신문에 <구호 라인에 서있는 그리스도>라는 그림을 실었다. 그 그림에는 예수가 자선을 베푸는 자들과 함께 있지 않고 구호 물품을 받으려는 실직자, 노숙자들과 나란히 줄에 서있다. 아이젠버그는 그리스도가 가난한 자를 위해 서비스하는 쪽이 아니라 그런 서비스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약한 자들과 함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기쁨을 받아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들에게 그것들을 전하고 나누어서 하느님의 나라를 넓혀야 한다고 가르친다. 교회의 입장에서 세상은 구원의 대상이며 교회는 이를 위해 선교하고 봉사하는 조직이다. 어떤 면에서 교회가 걷고 있는 길은 끊임없이 자신의 소유와 지배를 늘려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세상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돌멩이 하나가 파문을 일으켜 온 연못에 퍼지듯이 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이 퍼져나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젠버그의 그림은 이처럼 자기중심적인 교회의 입장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가 서있는 곳은 베풀고 도와주는 쪽이 아니라 소외되고 지쳐있는 사람들 쪽이다. 예수는 크고 아름다운 성전과 화려한 장식에 둘러싸여, 거룩한 산에서 변모된 빛나는 모습이나 부활하신 능력의 존재로 교회 안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세상 안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자들을 찾아다닌다. 부당하게 해고된 실직자들과 함께 불의에 항거하고 있고, 원통하게 죽은 가족들의 영정을 목에 건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눈물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의 삶을 본받고 따르고자 한다면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다.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 정부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신학자 본회퍼 역시 옥중에서 남긴 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 가장 능력 있는 존재, 최선의 존재에 대한 ‘종교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이것은 진정한 초월이 아닙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타인을 위한 존재’, 즉 예수의 삶에 참여하는 새로운 삶입니다. 끝이 없고 이루기 어려운 과제들이 아니라, 매 순간마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닿을 수 있는 이웃이 초월적 존재입니다.”(본회퍼, <옥중서간>)

그러므로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면, 그분을 향한 우리의 갈망이 크고 우리의 기도가 간절하다면, 우리가 찾고 있는 예수가 어디에 있는지 바로 보아야 한다. 그곳이라야 도리어 우리가 구원받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은 권력과 재물로 거대한 성을 쌓아놓고 거짓 약속을 거듭하는 자들로부터 조롱당하는 사람들, 억울하고 서글픈 사연을 털어놓을 곳 없어 울부짖는 사람들, 하루를 더 버틸 기력이 없어 오늘도 ‘자신의 종말’을 상상하는 사람들... 2015년의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들과 같은 구호 라인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장섭 / 사회복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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